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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반지
2024-08-28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반지
'글. 이정연'
부모님 유품이 담긴 함지박을 꺼냈다. 두 분이 돌아가신 후, 비교적 덩치 큰 유품들은 다 태웠다. 제대로 보관하지도 못할 거면서 볼 때마다 부모님 생각에 눈물 흘릴 생각을 하니 차라리 한꺼번에 슬퍼지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기도 하였다. 손때 묻은 가재도구들은 다 없애고 바가지 모양의 재래식 다리미, 화롯불쏘시개, 인두, 베틀의 북이나 바디 그리고 시계 비녀 반지 등이 남았다. 어느 하나 어머님의 눈물이나 애환이 스미지 않은 물건이 없지만 그 중에도 두 분의 반지는 당신들이 늘 몸에 지니시던 것이라 각별한 정이 느껴진다. 꺼내어 가만히 손에 껴 보면 생전 다정하시던 손을 잡은 듯하다.
내가 취직이 되고 시골집에 들렀을 때 동네의 어머니 친구 한 분이 놀러 오셨는데, 어머니의 눈길이 은밀히 그분의 금가락지에 머무는 걸 보았다. 내색은 않으려 하셨지만 설핏 스치는 부러움이 몹시도 안쓰럽고 죄송했다. 월급날을 기다려 두 돈 반쯤 되는 중량의 금으로 대충 어림짐작한 크기의 반지를 만들어 드렸다. 웬 반지냐 면서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빛 없이 좋아하시는 걸 보니 그 동안 얼마나 갖고 싶으셨을까 싶어 또 한 번 가슴이 미어졌다. 어머니의 반지를 그렇게 끼워 드리고 나니 아버지의 성화가 불같았다. 농사꾼이 웬 반지냐 시며 당장 도로 물리라고 다그치셨다.
혹시나 싶어 "아버지도 반지 하나 해 드릴까요?"했더니 화로에 놓인 곰방대를 치켜들며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다지 나쁘기만 한 표정은 아니었다. 다음 달 월급으로 아버지 반지를 해 드리려고 금은방에 들렀는데 도무지 반지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해야 할 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 손이야 가끔 만져보고 대충 짐작을 했지만 아버지의 앙상한 손은 도무지 굵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제 엄지손가락 만할 거예요." 라고 했더니, "남자 손은 보기와는 달리 손마디가 있어 넉넉하게 해야 한다."며 친절하게도 말한 크기보다도 한 치수 큰 걸로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대구로 오는 길에 몰래 사랑방 윗목에 두고 왔다. 두어 달 후 시골집에 갔더니 놀랍게도 아버지께서 그 반지를 끼고 계셨다. 커서 헐렁한 반지를 손바닥 안쪽 보이지 않는 곳을 무명실로 찬찬히 감아, 당신 손에 맞춰 끼고 계셨다. 피식 웃음이 나오며, 그 동안 '시장하지 않다.' ' 고단하지 않다.'등 얼마나 많은 말씀들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 다시 한 번 나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반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 분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선 어머니의 반지는, 반지에 새겨진 꽃무늬가 다 닳아 거의 알아볼 수 없이 되어 있다. 외출 때만 끼시던 것을 ‘자주 끼셔야 본전 뽑는다, 딸이 해 드린 거 자랑이라도 해 주세요.' 몇 마디 주문 끝에 마지못해 끼신 그 반지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일을 어머니와 함께 했다.
타작마당의 지푸라기 속을 헤집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 콩밭 매는 호미를 잡은 손에도 늘 함께 하고 구정물 담긴 설거지통 속에도 담기며 고락을 나누었다. 반면 아버지의 반지는 가느다란 빗금이 그대로 남아 있음이 재미있다. 그 반지를 끼시던 무렵부터는 전혀 농사일을 손도 대지 못하셨던 까닭이다. 천수답 몇 마지기 벼농사도 어머니께 맡기고 종일 담배를 까서 곰방대에 담아 피우곤 하셨다. 아마도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달래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하루 종일 담뱃불을 끄지 않으셨다. 그러니 반지는 자연 깨끗한 무늬가 그대로인 것이다. 부드러운 무명으로 살살 닦고 있으니 꿈결인 듯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반지를 제자리 함지박 속에 넣으며 내 반지를 보았다. 어머니 반지 보다 아버지 반지 쪽에 가깝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또 밥은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 주고 설거지마저 고무장갑을 끼고 하니 그런 것인가 하다가도 여지없이 게으른 내 탓인 것도 같아 슬그머니 죄송해진다.
반지의 무늬가 다 닳아 없어지도록 일만하시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버린 부모님, 당신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을 어찌 뒤늦은 지금에야 가슴 아파하는지, 이런 날은 그냥 실컷 울어 라도 보고 싶다.
내가 취직이 되고 시골집에 들렀을 때 동네의 어머니 친구 한 분이 놀러 오셨는데, 어머니의 눈길이 은밀히 그분의 금가락지에 머무는 걸 보았다. 내색은 않으려 하셨지만 설핏 스치는 부러움이 몹시도 안쓰럽고 죄송했다. 월급날을 기다려 두 돈 반쯤 되는 중량의 금으로 대충 어림짐작한 크기의 반지를 만들어 드렸다. 웬 반지냐 면서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빛 없이 좋아하시는 걸 보니 그 동안 얼마나 갖고 싶으셨을까 싶어 또 한 번 가슴이 미어졌다. 어머니의 반지를 그렇게 끼워 드리고 나니 아버지의 성화가 불같았다. 농사꾼이 웬 반지냐 시며 당장 도로 물리라고 다그치셨다.
혹시나 싶어 "아버지도 반지 하나 해 드릴까요?"했더니 화로에 놓인 곰방대를 치켜들며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다지 나쁘기만 한 표정은 아니었다. 다음 달 월급으로 아버지 반지를 해 드리려고 금은방에 들렀는데 도무지 반지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해야 할 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 손이야 가끔 만져보고 대충 짐작을 했지만 아버지의 앙상한 손은 도무지 굵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제 엄지손가락 만할 거예요." 라고 했더니, "남자 손은 보기와는 달리 손마디가 있어 넉넉하게 해야 한다."며 친절하게도 말한 크기보다도 한 치수 큰 걸로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대구로 오는 길에 몰래 사랑방 윗목에 두고 왔다. 두어 달 후 시골집에 갔더니 놀랍게도 아버지께서 그 반지를 끼고 계셨다. 커서 헐렁한 반지를 손바닥 안쪽 보이지 않는 곳을 무명실로 찬찬히 감아, 당신 손에 맞춰 끼고 계셨다. 피식 웃음이 나오며, 그 동안 '시장하지 않다.' ' 고단하지 않다.'등 얼마나 많은 말씀들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 다시 한 번 나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반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 분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선 어머니의 반지는, 반지에 새겨진 꽃무늬가 다 닳아 거의 알아볼 수 없이 되어 있다. 외출 때만 끼시던 것을 ‘자주 끼셔야 본전 뽑는다, 딸이 해 드린 거 자랑이라도 해 주세요.' 몇 마디 주문 끝에 마지못해 끼신 그 반지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일을 어머니와 함께 했다.
타작마당의 지푸라기 속을 헤집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 콩밭 매는 호미를 잡은 손에도 늘 함께 하고 구정물 담긴 설거지통 속에도 담기며 고락을 나누었다. 반면 아버지의 반지는 가느다란 빗금이 그대로 남아 있음이 재미있다. 그 반지를 끼시던 무렵부터는 전혀 농사일을 손도 대지 못하셨던 까닭이다. 천수답 몇 마지기 벼농사도 어머니께 맡기고 종일 담배를 까서 곰방대에 담아 피우곤 하셨다. 아마도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달래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하루 종일 담뱃불을 끄지 않으셨다. 그러니 반지는 자연 깨끗한 무늬가 그대로인 것이다. 부드러운 무명으로 살살 닦고 있으니 꿈결인 듯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반지를 제자리 함지박 속에 넣으며 내 반지를 보았다. 어머니 반지 보다 아버지 반지 쪽에 가깝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또 밥은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 주고 설거지마저 고무장갑을 끼고 하니 그런 것인가 하다가도 여지없이 게으른 내 탓인 것도 같아 슬그머니 죄송해진다.
반지의 무늬가 다 닳아 없어지도록 일만하시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버린 부모님, 당신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을 어찌 뒤늦은 지금에야 가슴 아파하는지, 이런 날은 그냥 실컷 울어 라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