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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봉우리 어머니 같은 산에 안기다

2021-06-14

라이프가이드 여행


성큼성큼 팔봉산,은적산 따라
여덟 봉우리 어머니 같은 산에 안기다
'팔봉산과 김복진, 김기진 '

    바람이 나무에게 말을 건다. 잎들이 흔들린다. 팔봉산 여덟 봉우리, 단풍 든다. 밤처럼 어두웠던 시절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있었다고. 상기된 잎들이 몸을 떤다.
    아직도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나무들의 발치에서 식어간다. 
여덟 명의 큰 인물이 난다는 _ 팔봉리
    그런 마을이 있다. 마을 뒤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8개의 봉우리 정기를 받아 8명의 큰 인물이 날 거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는 곳. 그 산의 이름은 팔봉산이고, 마을 이름은 팔봉리이다. 이 마을에서 김복진, 김기진 형제가 태어났으니 여덟 명의 인물 중 두 명은 확인이 된 셈이다.
    팔봉리는 팔봉산 아래 왼편의 구뜸과 가운데의 중뜸, 오른편의 석발이라는 자연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곳이다. 김복진, 김기진 형제가 태어난 곳은 그 중에 안온한 터인 중뜸. 마을사람들은 형제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생가 위치만큼은 확실하게 일러준다. 잊을 만하면 찾아온다는 답사객들이 기억을 되살려주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인 형제의 집안은 팔봉리 일대의 지주였기에 마을에서 가장 크고 좋은 기와집에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심히 흘러간 시간탓일까. 지금의 생가터엔 슬레이트 지붕의 쓰러져가는 빈 집만 남아있다. 
 
김기진·김복진 생가
 
프로문학에서 친일 문학으로 _ 팔봉 김기진
    형제 중에 세상과 마을 사람들의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쪽은 동생 김기진(1903~1985)이다. 그의 호가 고향의 이름을 딴 ‘팔봉’이기도 하려니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이라고 할 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라. 1920년대 가장 혁신적인 참여문학 작가이자 이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19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극에서 극으로의 변신이었다.
    형제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 연구자들은 김기진의 변절이 형 김복진의 죽음 이후 시작됐다며 안타까워한다. 김복진은 동생 김기진에게 사상적, 예술적으로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기에 그런 형이 세상을 떠나자 김기진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대동아전송가>나 <님은 부르심을 받들고서> 같은 글을 쓴 친일행적을 온전히 이해받을 수는 없으리라. 김기진은 한 때 ‘독립을 위한 비밀공작을 했다’며, 자신의 친일행각이 독립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외면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으니, ‘나의 의도는 딴 곳에 있을망정 내가 남겨놓은 친일문자에 대한 수치감은 어찌할 것인가’(<독서신문> 1976.4.18.)라고 한 줄 참회록을 남기기도 했다. 
 
김기진·김복진 생가
 
사람은 역사 속에 살아야 한다 _ 정관 김복진
    저명도로는 동생만 못하나 그 진가를 따지자면 팔봉산 여덟봉우리의 정기를 모두 타고난 듯한 인물이 있다. 팔봉 김기진의 형인 정관 김복진(1901~1940)이다. 김복진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 한국 근대 조소미술의 첫 길을 낸 조각가였고, 근대 미술비평의 첫 스승이었으며, 토월회를 만든 연극인이었고, 김기진과 박영희를 비롯한 카프 동인들의 사상적 맏형이자 문예비평가, 언론인, 독립운동가, 그리고 불상佛像 조각의 대가였다.
    김복진의 활동기간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1925년부터 194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인데, 그마저도 일제의 감옥에 갇혔던 5년8개월의 옥중생활을 제외하면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한국 미술과 문예운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특히 20세기 한국조각 장르에 끼친 영향은, 시문학으로 치자면 최초의 모더니즘 시인이자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의 위상, 그 이상이라고 할까. 
    하지만 김복진의 이야기는 여전히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있다. 서른아홉의 짧은 생을 살고 떠난 거인이 고향 팔봉산자락에 돌아와 묻혔다는 사실을 아는 이조차 드물다. 옥고를 감내하면서도 평생 ‘사람은 역사 속에 살아야 한다’는 좌우명을 간직했던 정관 김복진. 엄혹한 시절 저항의 방편이었던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세상은 오랫동안 그를 가려진채 두었고, 사후 43년이 지난 1993년에야 항일경력을 인정,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근대 미술인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인생행로는 반드시 고난을 배경으로 하여서만 그 색채가 뚜렷하다. 간난과 싸우고 역경을 극복하는 곳에서 비로소 생명의 약동을 보는 것. 사람은 역사 속에서 사는 것이 가장 옳게 살고, 가장 오래 사는 것이다.” _ 아내 허하백의 글에 소개된 김복진 어록  

여덟 봉우리 어머니 같은 산 _ 팔봉산
    해발 291m. 팔봉리의 동쪽에 병풍을 두른 듯 서 있는 팔봉산은 어머니처럼 아늑하고 너른 품을 가진 산이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팔봉산 봉우리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에 찾아도 좋다. 팔봉리에서 난 김복진과 김기진 형제는 이산의 어느 계절을 그리워했을까.
    1봉부터 출발하는 팔봉산 등산은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라 오르내림이 적어 숲속을 산책하는 느낌이다. 그 길에서 아담한 돌탑들을 만난다. 여덟 인물이 난다는 팔봉산 능선을 넘으며 돌탑을 쌓은 사람들의 소원은 어떤 것일까. 부디 그 소원들이 돌탑을 쌓아올리듯 차곡차곡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팔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3봉이다. 여덟 봉우리를 빚어 산세가 오묘한 팔봉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의 명당으로 꼽힌다. 그래선지 길섶 곳곳에 무덤들이 많기도 하다. 하긴 어머니 같은 산이 품을 내주는 것이 어찌 산 자들만을 위한 것일까. 
 
(左)팔봉산 돌탑과 등산로  (右) 팔봉산 원경
 
고향처럼 아늑한 옛길 _석실고개와 모래봉의 김복진 무덤
    팔봉산 1봉에서 출발해 줄곧 외길을 걸어 암릉인 7봉까지 닿는다. 시원한 전망을 감상하고 내려가 큰 바위를 지나면 곧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오른편으로 내쳐가면 8봉에 닿고, 왼편으로 가면 석실고개로 내려서게 된다, 석실고개는, 청주에 아직 이런 길이 있을까 싶을 만큼 호젓하고 예쁜 옛길이다.
    폭신한 흙길 구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게 아쉽지만 고향처럼 아늑한 느낌이 좋다. 예전 팔봉리 사람들은 이 석실고개를 넘어 30리길 청주장을 보러 다녔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삶 속에 실핏줄처럼 이어졌던 이 옛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모래봉에서 내려다 본 김복진 묘소

    석실고개에서도 길은 두 갈래다. 옛길을 따라 팔봉리 마을로 내려설 수도 있고, 서낭나무를 지나 팔봉산 자락에서 이어진 모래봉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 그래도 이왕 내친걸음이라면 모래봉으로 올라갔다 돌아오는 건 어떨까. 구암리를 바라보는 모래봉 산자락에 정관 김복진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팔봉산의 정기를 타고 난 큰 인물이나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쓰러진 거인의 무덤과 먼발치에서라도 눈을 맞춰보기를. 그곳에서 바라보는 들과 마을이 김복진이 품었던 꿈처럼 멀리까지 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