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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고무나무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고무나무
'글.박종희'

    인도네시아의 고무나무 숲이다. 녹음이 짙은 숲으로 들어서자 한가로이 풍경을 복사하던 고무나무가 놀라 휘청거린다. 문실문실 잘 자란 나무가 추임새를 넣을 때마다 숲은 온통 초록의 기운으로 가득해진다. 
    숲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낯선 풍경들이 발목을 잡는다. 고무나무 밑동과 옆구리에 칼자국이 나 있고 생채기가 난 곳마다 작은 고무통이 매달려 있다. 나무에 끌이나 칼로 그어 상처가 생긴 홈에서는 하얀 액체가 흘렀다. 의아해하는 우리를 보란 듯이 원주민은 끌로 나무를 그었다.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서 삐져나오는 속살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고통을 삭이며 말없이 서 있는 고무나무가 애처로워서다. 
    고무나무는 생명력이 강해 꺾꽂이해도 잘 자란다. 인도네시아 숲에서 고무나무의 일생을 보고 온 뒤 집에 있는 고무나무에 더 애착이 갔다. 나와 같이 10년을 함께한 나무다. 손이 많이 안가면서도 집안 공기정화와 냄새를 제거해주는 신통한 고무나무에 물을 줄 때면 남편의 야윈 젊은 날이 나무 위로 겹쳐졌다. 





    태곳적부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고무나무처럼 남편도 시숙한테는 한그루의 고무나무였다. 결혼하니 혼자되어 아들 둘 데리고 사는 시숙이 있었다. 사람은 한없이 서분서분하고 머리도 뛰어난데 자립적으로 살지 못했다. 아주버니와 같이 생활하니 불편하기도 했다. 집에서 옷을 자유롭게 입을 수 없고 찬거리 걱정도 만만치 않았다. 주말이면 시숙 식구들과 같이 움직여야 했다. 여름철엔 휴가도 같이 갔다. 으레 그래야 하는 줄 알면서도 가슴 한편엔 체한 것처럼 묵직한 돌멩이가 매달려 비킬 줄 몰랐다.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랐지만, 같이 지내니 종종 갈등도 생겼다. 시숙은 고질병이 있었다. 한 번씩 병이 도지면 슬그머니 집을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나가면 마땅히 갈 곳도 없으면서 시숙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전날까지 잘 근무하던 직장에도 말없이 결근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시숙을 찾으러 다니느라 무던히도 애썼다.
    걸핏하면 없어지니 남편도 시숙을 찾는데 이골이 났다. 오래 기다리면 순해진다는 것을 시숙은 알았을까. 한뎃잠을 자며 사람의 애를 태우다 남편의 화가 풀어질 때쯤이면 시숙은 어색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연인 사이가 이처럼 돈독할까. 처음엔 펄펄 뛰며 다시는 형을 안 볼 것 같던 남편도 시숙이 돌아오면 금세 마음이 누그러졌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마치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듯이 언제나 시숙의 자리를 비워 두고 있었다.
    남편한테 시숙은 어쩌면 혼자되신 시어머니보다도 더 아픈 손가락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남편의 속은 고무나무처럼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소화를 못 시켜 수시로 소화제를 먹고 신경안정제를 먹기도 했다. 화병 난 남편을 보기 힘들어 가끔 악악거리며 바른말을 하고 싶다가도 시숙의 선한 얼굴을 마주하면 외려 연민이 일었다.
    나무의 일생이 인간의 생과 유사하지만, 고무나무의 속성은 유독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았다. 한 생을 살아가는 고무나무는 산통을 겪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경외롭다. 마지막 한 방울의 수액을 뽑아낼 때까지 흔들림이 없다. 마치 운명인 것처럼 싫은 내색 없이 푸르게 서 있다. 
    가정을 꾸리고 한동안은 재미나게 살던 시숙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청천벼락 같은 일이었다. 살아 있을 때도 남편의 그림자를 밟고 다니더니 돌아가시면서도 시숙은 남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슬픔을 누를 사이도 없이 엉겁결에 장례를 치르고 올망졸망 남겨진 조카들이 남편의 눈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시숙 모습을 한 앙증맞은 그림자들이었다. 





    화분을 옮기다 꺾인 고무나무 잎을 떼었더니 잎이 떨어진 나무에서 하얀 수액이 흐른다. 상처 난 나무 부위를 휴지로 닦았는데 수액 묻은 휴지가 고무처럼 단단해진다. 이제야 고무가 질기고 단단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시숙이 남편의 곁을 떠난 지 벌써 7년째다. 시숙의 고무나무였던 것처럼 남편은 아직도 시숙이 즐겨 입던 운동복 바지를 버리지 못한다. 며칠 전 고무줄이 느슨해졌다고 벗어놓은 바지에서 빼낸 고무줄을 슬쩍 잡아당겨 본다. 남편의 옷이지만 시숙이 종종 입었던 거라 그런지 쉬이 끊어지지 않는 고집스러운 성질이 천생 시숙과 남편 사이 같아 피식 웃음이 난다. 
    생전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시숙이 바람이 되어 다녀가는 것일까.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명지바람에 진초록의 고무나무 이파리가 다팔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