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둥지를 트는 일은
'글. 최명임'

“올해는 큰 바람이 없을라나-.”
기골 장대한 나무 우듬지에 세워놓은 까치의 누각을 올려다보며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해 불어 닥칠 바람을 우린 짐작도 못하지만. 새가 집을 짓는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새도 영물이라 된바람이 오는 해는 더 내려앉아 나무의 든든한 어깨에다 둥지를 튼다던 말씀 기억 한 편에 박혔다.
난 초록이 무성하고 솔숲이 올려다 보이는 곳, 새들이 집을 짓고 무수한 풀벌레가 둥지 틀고 사는 산골 우듬지에 살았다. 바람을 막아주는 부모님과 이웃의 정이 물씬물씬 풍기는 곳이라 그곳이 최고인줄 알았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언제부턴가 마당에 있는 어린 소나무에 산까치가 집을 짓기 시작했다. 풀숲도 있고 뒷산에 듬직한 나무가 수두룩한데 아슬아슬한 나무 한편을 빌려 둥지를 틀고 있다. 지푸라기를 줍고 나무 잔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엮었다. 하늘을 지붕 삼았으나 비는 흠뻑 다 맞을 터. 새끼들의 깃털을 적시고도 남을 그 비가 술술 새어나가도록 성글게 꾸몄다. 난 그곳에서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을 상상하며 나의 냄새가 건너가지 않게끔 멀리서 살폈다.
인(人)내가 풀풀 나는 마당 가운데 짓고 있으니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주 모르는 철부지일 테다. 처음에는 그들의 처마 밑을 엿볼 수 있어 호기심이 동했지만, 걱정도 했다. 손녀들에게 알려주었더니 주말에 새 둥지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카톡, 카톡, 귀가 따가워 들여다보니 “할머니, 새는 뭐 하고 있어요? 집은 다 지었어요? 아기는 낳았어요?” 제 어미의 전화기를 빌려 궁금증을 쏟아낸다.





무슨 사달이 났는지 집이 더 올라가지 않는다. 짓다 만 둥지가 부실공사의 표본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다. 미처 철거도 못 한 채 버려두고 떠났지만,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사는 그들의 흔적이라 그대로 두어도 아름답다. 혹여 사람 냄새에 질려 황황히 떠났을까. 아님 새끼를 키우기에 적소가 아니란 것을 늦게라도 알았을까. 미물도 그러니 사람은 더더욱 해악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둥지를 틀고자 눈을 부릅뜨고 명당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손녀에게는 내가 짐작하고 있는 이유를 자분자분 설명해 주어야겠다.
산 등에 있는 큰 갈참나무 우듬지에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하늘이 무척 가깝고 세상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주 멀리 날아볼 꿈을 꾸어도 좋을 만큼 시야가 한정도 없이 트였다. 새끼를 키우기엔 그만이다. 아마 그들일 거다. 그간 몇 차례나 더 이사하고 거기에 안착하였을까. 내 눈에는 바람이 메칼 없이 장난으로 날려버릴 것 같고 우악스런 짐승이 나무를 타고 올라 덮칠 것 같이 아슬아슬하다. 나의 조바심일 뿐 사람의 간섭에도 바람의 장난에도 끄떡없는 곳이리라. 맹모삼천지교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올려다보았다.
어미가 생애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알을 품을 거다. 그들을 황홀하게 하는 대사건이 벌어지면 존재감은 최고조에 이르리라. 그날 이후로 거센 파도와 된바람에도 날개가 부르트도록 날아야 하는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새끼들은 고 작은 입을 벌리고 날고 싶다고 아우성칠 테니. 날개가 돋아나면 사는 법을 가르치고 날개가 더욱 탄탄해지고 멀리, 높이 날아오를 준비가 되면 드디어 대장정에 오르겠다. 그 어미도 나처럼 슬픔이 양념처럼 곁들인 행복한 눈물을 흘리려나. 나의 영역을 침범해서 단내 풍기는 복숭아를 훔칠 때마다 앙큼하다고 모진 말 매를 주었는데.





내가 둥지를 틀고 고만고만한 새끼들을 품고 있을 때가 저맘때였을까. 알콩달콩 살아오던 날들이 눈에 선하다. 튼튼한 둥지를 찾아 몇 차례나 이사하고 더러는 나의 둥지를 놓친 날도 있었다. 잠시 거쳐 가는 둥지에서도 아이들은 잘 커주었다. 그 아이들이 하나둘 둥지에서 떠날 때마다 어머니처럼 나도 눈물 한 동이는 흘렸다. 저들도 이젠 탄탄한 땅에다 둥지를 틀고 새끼들의 재재거리는 소리와 함께 땀 흘리는 하루가 즐겁단다.
빈 둥지의 공허감도 무디어지고 떠나는 것이 이별이 아님을, 슬픔도 아님을 짐작하는 나이가 되었다. 영원한 이별이라 여겼던 어머니와 소중한 인연들도 또 다른 무엇으로 돌아와 함께 숨 쉬고 있음을, 생각해보니 우리는 우주라는 큰 둥지 안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그 안에서 언제나 하나였음을 알 것도 같다.
둥지는 고차원적 산실이다. 그것이 마음에 있든 우듬지에 있든 마당에 있든 또는 더 크거나 더 작거나 하는 인간이 정한 가치의 개념을 버리면 신성하지 않은 곳이 없다. 태어나고, 번성하고, 진화하고, 소멸하는 섭리가 존재하는 총체적 공간이며 그곳이 바로 우주이기 때문이다.
둥지를 트는 일은 고귀한 작업이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를 배운 적 없는 산까치의 본능적 행위에 감동하고 맹모삼천지교를 거울삼아 둥지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순순한 가슴에 감동한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둥지는 내 안에도 있는데 잡초 밭과 봉당 밑 견 서방, 뒷간과 수채고랑에도 있었다. 아니 천지사방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생명들로 작은 행성의 하루가 부산하고 또 부산했다. 그 엄연한 사실에 가슴이 또 한 번 뭉클했다.

EDITOR AE류정미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우리 숲 이야기 공모전 수상
추억의 우리 농산물 이야기 공모전 수상
매일 시니어 문학상 수상
수필집 빈 둥지에 부는 바람, 언어를 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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