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농월정에서
'글. 이정연'

농월정, 망월사, 월연지, 월영교, 월곡지, 월송정 나는 월(月)자가 들어간 곳은 어디든 가고 싶다. 은은한 달빛 아래서 보면 하찮은 것도 꽤 낭만적일 것 같은 막연한 느낌 때문인지 모른다. 망월사도 여러 번 다녀왔고 월영교도 가 보았지만, 농월정은 가보지 못해서 늘 가고 싶은 곳 일 순위로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 특히 농월정은 다른 장소가 달을 주체로 붙여진 이름인 데 반해 사람이 주체가 된 이름이다. 감히 누가 하늘에 박힌 달을 희롱할 수 있는가? 그 배포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농월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 박명부가 1637년 초건하고 여러 번 중수한 후 현재의 모습은 1899년 건립된 모습이라고 한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나는 지도로 먼저 찾아본다. 농월정을 검색하고 스카이뷰로 보니까 정자 앞 널따란 암반과 계곡이 얼마나 수려한지 꼭 좋은 계절에 볼 거라 다짐하고 아껴 두었다. 연둣빛 신록이 흐르는 봄밤 계곡 양쪽으로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다. 꽃향기는 계곡에 가득하고 달 아래 소에 잠겨 흔들리는 달을 보면 그게 농월일까? 암반 홈에 물이 고이고 물 고인 곳마다 달이 떴는데 그 달 숫자를 헤아리는 일은 또 얼마나 즐거울까. 가방 한쪽에 술 한 병 숨겨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나 세상일이 더러 그런 것처럼 마음에 담고 있는 장소는 얼떨결에 가보게 된다. 같은 일을 하던 친구가 거창으로 일터를 옮겼고 거기 다니러 갔는데 가까이 좋은 곳이 있다면서 우리 일행을 농월정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진작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 준비 없이 맞선보러 나가 당황한 처녀처럼 그렇게 농월정 앞에 섰다.
농월정 건물은 나를 좀 실망하게 했다. 멋진 이름에 걸맞게 정자에는 시인 묵객의 흥에 겨운 시가 더러 적혀있고 주춧돌은 골이 패고 더러 벌레 먹어 세월의 흔적을 숨기지 못한 채 늦가을 계곡에 고졸한 모습으로 서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상상을 무참히 깬 단청이 만추의 단풍색보다 선명하고 화려했다. 2003년 농월정은 원인 모를 화재로 전부 불타고 2015년 9월 재건했는데 아무리 유능한 목수도 농월정 그 풍류의 세월을 다 담기는 어려웠나 보다. 그러나 깊은 계곡과 넓은 암반 그 위로 단풍잎을 싣고 흐르는 맑은 물이 많아서 풍류뿐만 아니라 호연지기를 키우기에도 더없이 좋은 풍광은 그대로였다. 오랜 세월 계곡물에 씻긴 암반은 나부의 살결처럼 매끄럽고 깊게 팬 암반의 물웅덩이엔 달 대신 고운 단풍잎이 잠겨 예뻤다.





마음 같아서는 계곡 저 아래로 내려가 바위 하나하나 눈 맞춤하고 만져보고 계곡물에 잠긴 낮달에 말을 걸고 싶다. 나는 아직 아쉬움이 남아 발목 잡혀 있는데 가을 해는 짧고 먼 길 가야 하는 일행은 벌써 저만치 앞서간다. 풍류객에서 빠지면 서러워할 문단의 한 선배는 그 바위 홈마다 술을 붓고 달을 희롱하다가 그 술이 동날 때까지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나도 그 주회 말석에 앉아 달을 노래할 수 있다면 다시 와야 한들 대수일까. 더 오래 기다린들 그 또한 감미롭지 않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낭만과 멋을 잃어버렸다. 먹고 살기 팍팍한 세상에 무슨 낭만과 멋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멋과 낭만은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급히 가는 사람의 발길을 잠시 붙들어 둘 수 있다. 물가에 앉아 흔들리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본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삐 가야할 만큼 그 일이 소중한 거냐고.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냐고.

EDITOR 편집팀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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