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우도에서의 슬픈 노래
'글. 이정연'

피서철이 지난 우도는 주말인데도 석양 때문인지 더욱더 고즈넉하였다. 숙소로 가는 길엔 개 한 마리만 어슬렁거리며 우릴 맞았고 묵기로 한 숙소도 이웃 민박집에도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숭숭 뚫린 검은 돌담 사이로 불어온 바람만 오수에 든 쑥부쟁이를 이따금 흔들어 볼 뿐 우도는 그저 조용하기만 하였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숙소 주인에게 키를 건네받아 짐을 풀어놓고 검멀래해안으로 출발하였다. 산호사 해변도 텅 비었고 동굴음악회 행사를 하는 검멀래해변에도 버스 두 대에 분승한 관광객들만 드문드문 오갈 뿐 조락의 우도는 가을이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잠깐 해안으로 내려가 갯냄새가 스민 검은 모래톱을 걸어 동안경굴을 보고 다시 언덕 위로 올라오는데 바람 부는 바위틈과 바위벽 위의 난간에 갯쑥부쟁이가 보랏빛 예쁜 꽃을 무수히 피워 놓았다. 작고 동그란 얼굴 같은 꽃송이들이 모두 바다를 향해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적한 어촌에서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들이 포구에 나와 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같아 볼수록 애잔하다.
검멀래언덕 황무지의 마른 풀잎 새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마구 흔들리며 필사적으로 봉우리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봉우리에 올라가면 그리운 누군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도 바람에 흩날리는 새처럼 언덕을 올라보았다. 거기 간절히 기다리는 눈길들이 있었다.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자라고, 섬에 내리는 빗물을 받아먹고 늙다가 한 번도 섬 밖으로 나가보지 못하고, 다시 섬이 되기 위해 우도의 산기슭에 작은 무덤으로 남은, 이름 모를 영혼들이었다.
막 넘어가는 햇살에 비친 봉분이 그윽하게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해쓱한 얼굴처럼 작은 봉분들 때문에 새들은 그렇게 미친 듯 언덕을 달려 올라오곤 했나 보다. 보이는 곳마다 온통 쓸쓸한 풍경에서 도망치려고 눈을 돌려보니 난간 울타리는 하늘로 가는 길처럼 아득하게 뻗어 있고, 하얗게 바랜 등대만 외로이 쪽빛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멘트 숲에서 계절을 잊고 살다가 바람 속에 맞게 된 섬의 조락에 가슴이 미어져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 우도에서 살고 싶어요."
"나는 우도에서 죽고 싶어요!"
K 선생님이 대답하시자 곁에 계시던 H 선생님은 ‘살고 싶은 것이나 죽고 싶은 것이나 결국 같은 말’이라고 하였다. 우린 다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죽고 싶다는 말이 오히려 훨씬 더 절실한 마음을 담은 말이라고 동의하였다. 말보다 더 간절한 의미가 쓸쓸히 부는 바람처럼 가슴에서 가슴으로 건너갔다.
구름 속 일몰이 좋지 않아 카메라를 들여놓고 숙소 뜰에 앉아 K 선생님의 하모니카 소리를 들었다. 등대지기 센 봉숭아 구슬픈 하모니카 음률이 차츰 어둠에 묻히는 고샅을 따라 퍼져 나갔다. 바다 건너 성산포엔 하나둘 불이 밝혀지고 하늘 저 끝에 뭇별들이 돋아나 물끄러미 우릴 내려다보았다. 초저녁 어스름이 너무도 적막하여 나도 몰래 눈물을 삼켰다.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쓸쓸함과 마주친 것처럼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인적 끊긴 고샅마다 채워진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딛자 늦가을 저녁의 여수가 통증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인근에 식당이 없어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아귀처럼 밥을 먹어도 갯냄새처럼 온몸에 배인 쓸쓸함은 가셔지지 않았다.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노랠 불러도 노랫소리가 멎자 또다시 가슴에선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났다.
늦은 밤 숙소로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산호사 해변으로 나갔다. 잘게 부서진 산호 알갱이들이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잔물결은 섬집 아기를 재우는 자장가처럼 부드러웠다. 밀려오는 파도가 이쪽에서 찰싹이면 저쪽에선 밀려가는 파도에 사락사락 산호알갱이들이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가 귓가에 간지러웠다. 은빛 잔잔한 수면 위로 숭어들이 뛰어올라 미끈한 몸에 달빛을 휘감곤 다시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알 수 없는 슬픈 가락의 귀 울림 나는 귀를 막고 모래톱에 누웠다. 열이레의 고운 달과 명징한 별들이 비행하는 새들처럼 구름 속으로 휙휙 지나쳐 갔다. 몸과 유리된 내 영혼도 별을 따라 하늘로 빨려 올라가 범선들처럼 떠다니는 잿빛 구름 속을 날아다녔다.
어느 날 문득 길을 가다 늪에 빠져 다시는 그 늪을 헤어날 수 없게 된 한 마리 새처럼 나는 차츰 우도에 빠지고 있었다. 몸을 떠난 내 영혼은 마른 풀잎이 날리는 황무지를 홀린 듯 배회하였다. 대자연의 거친 호흡 같은 일출을 맞는 동안 내 빈 몸을 쓸쓸한 우도가 차곡차곡 채웠다.
돌아오는 도항선 속, 나는 뱃전에 나가 멀어지는 섬 우도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영혼은 바람 부는 황무지에 버려둔 채 빈 껍데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쪽빛 바다 가운데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한 섬 우도가 해무에 갇혀 아련했다. 나는 머지않아 내 슬픈 영혼을 찾아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을 예감하면서 애써 외면하고 돌아섰다.

EDITOR 편집팀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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