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민의 시선으로 기록하다_시민에디터
시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청주 제일교회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는 23개의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

청주 기록활동가 양성 과정 ‘기초과정’, ‘심화과정’ 그리고 ‘실습과정’을 거친 청주의 시민기록가들이 한 단계 나아가 시민에디터가 되어 청주 미래유산을 시민의 시선에서 기록합니다.
청주 선교부(Mission Station)의 형성과 양관
초기 한국 기독교가 개항장이나 서울, 평양, 대구 등 큰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부를 성공적으로 설치한 이후, 선교부 설치는 지방 도시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충북은 서울과 남부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통과하는 곳이었습니다. 청주를 비롯한 충북지역 선교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초창기 외국 선교사 민노아입니다. 민노아 선교사는 1892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1893년 민노아 학당 3대 교장을 지낸 바 있습니다. 그는 서울과 황해도, 경기 남부지역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1900년에는 김흥경과 함께 청주에 와서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1893년 1월,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들이 모여 '선교사 공의회'를 구성한 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그 당시 미전도 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선교를 배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장로교에서는 선교사 인력 보충이 잘되지 않자, 충청도 지역을 침례교의 엘라 딩(Ella Thing) 선교회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엘라 딩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1895년에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하지만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1900년경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민노아 선교사와 조사 김홍경을 중심으로 청주를 비롯한 충북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1902년부터 청주 선교부 설치를 계획하였습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서는 경기 남부 지방에 전도 활동을 펴면서 서울과 대구 사이의 어느 곳에 선교부 설치를 물색하였는데, 이때 청주가 선교지부로 선정되었습니다. 충남의 공주는 이미 감리교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곳을 피하면서 장소를 물색할 때 청주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적합한 지역으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적합한 이유로 첫째, 이미 감리교가 들어선 충남 공주는 피하면서 철로를 이용할 수 있는 교통의 편의성 있다는 점. 둘째, 청주에는 이미 신대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점. 셋째, 청주지역은 역사적으로 문화 수준이 높고,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조치원과 가깝다는 점. 넷째, 민노아 선교사가 이미 와서 전도한 적이 있는 곳이므로 친숙감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청주지역이 1900년대 이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 지역이 되었고, 경기 남부 지방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와 김홍경 조사 일행이 남으로 내려와 청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민노아 선교사는 충북선교를 위해 1904년에 김흥경 조사와 함께 청주에 도착하여, 그들이 전도한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를 세우고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민노아 선교사와 김홍경이 전도하여 얻은 김원배, 방흥근, 이영균, 김재호, 이범준 등 당시 유망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1904년에 남문밖에 여섯 개의 방이 있는 커다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예배 모임을 가졌는데, 그것이 청주읍교회의 시작입니다.

충북_유형문화재_제133-4호(한국기독교사적_제9호 포사이드기념관)



민노아 선교사는 1904년 청주에 정착하면서 선교부의 활동을 위해 탑동의 언덕 일대를 매입하였습니다. 이때부터 1930년경까지 모두 15차례에 걸쳐 매입한 땅이 약 5만 여 평이었습니다. 1905년 여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1932년까지 선교사 사택, 선교지부, 병원, 성경학원 등이 차례로 건립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서양식 근대 건물이 그 유명한 청주 탑동의 양관(洋館)입니다. 민노아의 양관 건축은 청주 선교부의 선교전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학교-병원을 통한 선교전략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전략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청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지어진 양관은 지역주민들에게 큰 구경거리가 되었고 청주의 명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두 여섯 채로 구성된 양관은 1983년 3월 30일 충북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양관은 현재 청주 일신여자 중·고등학교 안에 4채, 또 학교 밖에 2채가 있습니다. 양관은 한국(조선)식 전통 건물양식과 서양식 붉은 벽돌 건물양식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노아의 생각이 잘 반영된 건축이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고 그들의 삶에 적합하도록 잘 절충하여 화려하지 않고 그렇다고 누추하지 않게 건축하였습니다.
충북 근대교육의 선구자, 민노아(閔老雅)(프레드릭 밀러, Frederick S. Miller, 1866~1937)
민노아 선교사(프레드릭 밀러, Frederick S. Miller, 1866~1937)는 충북 근대교육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밀러보다 ‘민노아’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민노아 선교사가 설립한 청주성서신학원(1921년 설립)은 100주년을 맞아 민노아 기념 찬송가비와 작은 흉상을 제작하였습니다. 문명의 후진국이었던 한국을 ‘품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보급이 늦어진 탓’이라고 애써 변명해 주며, 한국인 사랑에 앞장섰고, 특별히 청주를 포함한 중부권을 사랑하여 그의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쳐 헌신하였습니다.

左)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3호(한국기독교사적 제9~3호 밀러기념관) 右) 민노아선교사 흉상



민노아 선교사는 안나 밀러(Anna Reinecke Miller, 1865~1903)와 함께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습니다. 그의 나이 26세였습니다. 그의 아내 안나는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녀는 1898년에 출산한 아들(Fred)을 8개월 만에 잃었습니다. 이어서 1902년 출산한 아들(Frank)은 하루 만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부부는 연이어 슬픔을 겪었습니다. 당시 열악했던 환경으로 인해 잇달아 두 아들을 잃은 안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결국 내한 11년 만인 1903년 6월 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 선교묘역에 묻혔습니다.
아내를 잃은 남편, 두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슬픔을 겪은 후에도 그는 교육선교 사역을 지속했습니다. 1904년에 청주로 내려온 그는 충북 사람들을 위해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디며 희생할 수 있었는지 살아 계시다면 직접 만나 물어보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 당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에게 “당신이 전하는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대답 대신 한국어로 지은 “예수님은 누구신가”(1905년)라는 찬송시로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우는 자의 위로되시며,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찬송가96장)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슬픔을 겪은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과 질병 때문에 동일한 슬픔을 겪었던 사람들을 찬송을 통해 위로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죽게 되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청주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청주 금천동 뒷산에 안장되었으나, 1985년 일반인이 땅을 소유하게 되면서 일신여자고등학교 교내 양관 옆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청주시는 2023년 1월에 청주제일교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는 23개의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청주를 사랑하고 충북 근대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감당한 민노아 선교사를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청주제일교회의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가 복음 전도자로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 보여준 사랑과 정신은 다음 세대에게 꼭 전해져야 할 가치가 있는 무형의 미래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의 시선으로 기록하다, [2023 시민에디터]는 문화도시 청주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주 미래유산 이야기를 시민에디터의 목소리로 만나보세요.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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