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민의 시선으로 기록하다_시민에디터
시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수암골
'수암골 원주민의 목소리로 듣는, 1940~1960년대 수암골'

청주 기록활동가 양성 과정 ‘기초과정’, ‘심화과정’ 그리고 ‘실습과정’을 거친 청주의 시민기록가들이 한 단계 나아가 시민에디터가 되어 청주 미래유산을 시민의 시선에서 기록합니다.
기억 속의 수암골 “수암골 원주민의 목소리로 듣는, 1940~1960년대 수암골의 풍경”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우암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자 청주시의 대표 관광지, 수암골. 수동과 우암동 사이에 위치한 골짜기 마을이라서 수암골이라고 불리는 줄 알았는데, 수암골목 1번지 일대를 가리키는 동네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조용하고 한적하던 수암골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건 2007년부터다. 공공미술프로젝트로 지역의 예술가들이 수암골 골목 곳곳에 벽화를 그렸고, 익살스러운 그림들로 오래된 동네에 이색적인 풍경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그 후로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등장하고 마을 위쪽으로 전망 좋은 대형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수암골은 명실상부한 청주시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마을벽화와 영화·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수암골



수암골은 청주의 근현대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조금은 두서없이 꽂혀 있는 오래된 앨범 같다. 화려한 현대식 카페 건물들 아래로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는 오래된 옛집이 보이는가 하면 다채로운 색감의 벽화들 사이로 언제 쌓아 올려진 건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낡은 흙벽돌이 드러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관광객이 지나가는 골목에는 동네 주민이 내놓은 말간 햇고추가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말라가고 있다. 그래서 수암골을 거닐다 보면 다양한 시간 속을 여행하는 느낌마저 든다. 골목 곳곳의 수암골 안내판은 그 느낌에 확신을 더한다. 거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전형적인 달동네”라는 소개가 빠짐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암골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나 그 가족들, 혹은 전쟁을 피해 타지에서 건너와 정착한 피난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수암골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마을이다. 청주시 원도심에서 멀지 않았던 산동네 마을. 아마도 이곳은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집도 없고 돈도 없던 그들은 산자락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가며 터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을 지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이경찬, 77세)도 그들 중 하나였다. 우리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기 훨씬 전, 수암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수암골의 원주민이었다.
#1. “내가 태어난 집도 왜정 시대 때 소나무밭이었는데 소나무를 베고 땅을 개간하고서 지은 집이라는 거야” - 수암골 원주민, 1945년생 이경찬 씨
아빠: 봄날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게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여. 난 어릴 때 그렇게 태어난 줄 알았어.

수암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경찬씨(77세)



수암골에서 태어난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수암골은 선명한 ‘골목’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동네의 이미지.
나: 아빠, 태어난 집은 수암골 꼭대기 쪽이야?
아빠: 태어난 집? 아니, 동네 속이여. 근데 동네가 평평한 게 아니고 비탈길이거든. 군데군데 올라가면서 산비탈에 집을 지은 거라, 언덕 위에(의) 집도 있고 밑에(의) 집도 있고. 내가 태어난 집도 내가 태어나기 전 왜정 시대 때 소나무밭이었는데 소나무를 베고 땅을 개간하고서 지은 집이라는 거야. 그 집이 양철지붕이야. 그때 당시에 다른 집들은 다 초가집들인데 양철 지붕이면 돈을 꽤 많이 들인 거지.
나: 그때도 수암골이라고 불렀어?
아빠: (천천히 고개를 저으시며) 아니야. 수암골이라는 말은 최근 들어서 생긴 말이고. 원래 거기가 내덕동 쪽으로는 안덕벌이고, 우리 사는 데는 바깥덕벌, 한자로 외덕, 이렇게 구분을 했어. 그리고 동네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내가 살았던) 대성여상(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뒤쪽으로는 탁밭골이라고 불렀어. 우리가 살던 동네 밑으로는 전부 벌판이여. 논밭이 쭉 있었고. 그래도 중간에 큰 길가에는 상점도 있고 정육점도 있고 다 있었어.

수암골 주택 벽에 드러난 흙벽돌(2023)



#2. “원래 평화롭고 말썽 없이 살다가 그 사람들이 와서….” - 한국전쟁이 바꾼 수암골의 풍경
아빠: 나 다섯 살에 6·25전쟁이 났어. 그걸 여름 전쟁이라고 그랬는데, 형은 큰아들이니까 아버지가 데리고 가고, 밑에 동생은 젖먹이니까 어머니가 데리고 가고 나는 둘째니까 외할머니하고 가고, 그렇게 피난을 흩어져서 갔어. 그래 어디 친척집으로 가서 문간방에 들어갔는데,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 가경터미널 근처 발산공원이 아니었나 싶어.
왠지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갔다면 부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쪽의 다른 먼 지역으로 갔을 것 같은데, 그곳이 청주 내였다는 것이 생소하게 들렸다.
나: 아니, 피난을 청주를 안 벗어나고 청주 내에서 다닌 거야?
아빠: 그렇지. 6·25 전쟁 나고 피난을 갔다가 왔다가. 그때는 여기(발산공원 쪽)도 개발되기 전이니까 완전한 시골이여. 깊은 산 속이고. 그러다가 인천상륙작전이 9월 28일인데 그때 남한이 서울 수복하고 그러니까 이제야, 피난 갔던 사람들이 다시 (집으로) 들어오고 밭에 농사지어놓은 거 가을걷이하고 그랬는데, 1월 달에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기 시작했어. 그게 1·4후퇴, 그거는 겨울전쟁이라고 그랬어.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암골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피난민 정착촌이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수암골 원주민 입장에서 보는 당시의 풍경은 어땠을까.
아빠: 그 동네가 아주 평화로운 동네였는데 6·25 전쟁 겪고 나서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내려와 가지고, 산비탈을 깎아서 흙벽돌집들을 하나씩 지어놓고 입주시켜 놓으니 (먹고 살 것도 없고) 살기가 나쁘잖어. 그래서 마을 분위기가 안 좋았던 게 뭐든지 집어가, 뭐든지. 옛날(전쟁 전)에는 곡식을 심어놓고 나면 익고 수확할 때까지 뒀는데, 고구마도 심어서 좀 크기 시작하면 밑에서 다 캐가고, 곡식이 익으면 밤에 이삭도 다 캐가고. 농사가 안 되는 거야. 그러니 사람들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지. 그리고 마당에 뭘 이렇게 내놓으면 틈만 나면 가져가 버려. 그러니까 분위기가 서로 의심하게 되고 그럴 수밖에 없지. 물론 그 사람들도 살려고 하니까 그런 거지만, 원래 평화롭고 말썽 없이 살다가 그 사람들이 와서 분위기 흐트러뜨리니까 서로 경계하고 그런 분위기가 됐지.
수암골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평화롭던 마을에 생긴 변화가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다를 바 없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던 시절, ‘그 사람들도 살려고 그런 거니 어쩔 수 없다’라고 결국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수암골에서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시민의 시선으로 기록하다, [2023 시민에디터]는 문화도시 청주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주 미래유산 이야기를 시민에디터의 목소리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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