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민의 시선으로 기록하다_시민에디터
시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중앙공원
'중앙공원의 상징인 압각수는 무엇일까'

청주 기록활동가 양성 과정 ‘기초과정’, ‘심화과정’ 그리고 ‘실습과정’을 거친 청주의 시민기록가들이 한 단계 나아가 시민에디터가 되어 청주 미래유산을 시민의 시선에서 기록합니다.
중앙공원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면적 24,800평 규모의 공원이다.
지금은 적당한 숲과 환경 개선으로 쾌적한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공원이지만 1937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행정관청이 자리잡은 도내 중심지였다.
큰 은행나무 이름이 압각수
중앙공원 정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원 한가운데에 우람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은행나무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압각수로 수령이 천년 가까이 된다. 긴 세월 동안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은행나무라는 예쁜 이름을 두고 사람들은 굳이 압각수라고 부른다. 압각수(鴨脚樹)는 은행나무 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오리 압(鴨), 다리 각(脚)을 써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불린다.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으면 나중에 손주가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생긴 이름이다. 공원 일대는 고려시대 이후로 관아가 있던 곳으로 지금 남아 있는 압각수 외에도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 나무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중앙공원 압각수는 사계절 내내 홀로 우뚝하니 웅장하게 천년의 세월을 드러내고 있다. 봄에는 봄대로, 가을에는 가을대로 공원의 얼굴인 양 빛을 내고 있다.
압각수 아래 옛 풍경
청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은행나무에 대한 추억이 한두 개쯤은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만 해도 이 압각수 아래는 늘 많은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장소였다. 김밥이나 간식을 싸 와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먹는 모습, 세발자전거를 타는 어린 아들을 따라다니며 보살피는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졸업식이나 결혼식 날 압각수 아래에서 사진 찍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압각수, 중앙공원 압각수(사진. 시민에디터 김애중)



주말이면 큰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사진을 찍는 아저씨가 나와 있다. 아저씨 옆에는 압각수를 배경으로 찍은 멋진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 온 시민들에게 기념사진 찍을 것을 권하면서 좋은 자리를 안내한다. 그러면 대다수 시민들은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압각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촬영비를 계산하기도 한다. 사진사의 영업적인 호객행위가 시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선사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부모님을 모시고 온 딸들, 다정한 연인들이 사진 찍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덩달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사진기가 귀한 시대여서 이런 풍경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때였다. 지금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참고자료: 향토문화전자대전, 1500년 청주역사 한 바퀴 성안길 백년손님(2021문화원)
중앙공원이 품고 있는 역사 이야기
“중앙공원에는 임진왜란 시 청주성 탈환에 힘쓴 3명의 전장기적비가 있다”
중앙공원에는 언뜻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의외로 많은 비석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청주성 탈환전에서 향토의병을 이끌었던 박춘무(朴春茂)와 승병 영규대사, 의병장 조헌의 공적을 기리는 전적비가 눈에 띈다. 중앙공원(中央公園) 동쪽 출입구의 오른쪽 화단에 세 비석이 나란히 있다. 박춘무전장기념비(朴春茂戰場紀蹟碑)는 1988년에 세워졌으며 영규대사 전장기적비는 1974년 건립되었다. 조헌 전장기적비는 1710년 청주성의 서문 밖에 있던 것을 중앙공원으로 이전했다.

전장기적비 (사진. 시민에디터 김진주)



청주성 탈환 이야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청주는 왜장 구로다의 부하가 거느리는 부대에 점거되어 있었는데 방어사 이옥과 조방장 윤경기도 패하여 달아났고 의사 박우현도 전사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승병장 영규대사가 승병 500여 명을 데리고 청주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는데,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과 청주 복대동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박춘무가 이 소식을 듣고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성을 공격했다. 조헌의 병력이 청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옥과 윤선각의 관군이 왜군한테 잇달아 패한 상태였고 승병장 영규의 병력이 왜군과 며칠 동안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7월 30일 1차 공격을 했으나 실패, 8월 1일 2종일 치열한 전투를 실시하고 오후 갑자기 폭우가 내려 전군 철수했다. 8월 2일 재차 공격하니 왜군들은 조선군의 경계가 허술한 북문으로 전원 도주하고 없었다. 왜군들을 격파하지 못하고 도망가게 한 것은 아쉬운 점이나 임란 최초의 읍성 탈환으로 의의가 있다.
청주성 전투의 의의는 왜군과 조총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며 국토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왜군이 호남지역과 충청우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제거하였고 왜군의 남북 왕래 주통로 확보에 차질을 주었다. 그리고 관군과 명군의 반격 준비시간을 벌어주는데 기여했다.
청주 사람 박춘무 이야기
박춘무(1544-1611)는 청주 복대리 출신으로 조헌과 함께 토정 이지함에게 동문수학하여 찰방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청주 복대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시발, 한혁 등과 더불어 죽음으로써 청주를 탈환할 것을 맹세하였다. 당시 관찰사 윤선각이 돕지는 못할망정 공을 탐낸 나머지 의병의 처지를 못살게 구는 등 은근히 의병활동을 방해하였으나 박춘무는 굴하지 않고 의군을 모았다.

박춘무 전장기적비 (사진. 시민에디터 김진주)



임진왜란 이전에 박춘무의 조상이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발발 후 박춘무와 후학을 중심으로 빠르게 의병 모집이 가능했다. 박춘무 가문은 청주성 전투를 진두지휘하였으며 청주 부모산에서 전투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청주 지리에 해박한 박춘무는 청주읍성 남문을 맡기로 하고 15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전투에 임했다. 7월 28일 박춘무는 조헌과 영규대사, 관군이 만나 각각 남문, 서문, 북문을 맡기로 하였다. 청주지리를 잘 아는 박춘무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8월 1일에 조헌의 의병과 더불어 청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호서의병의 우의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뒤 진천지역으로 진격하여 진천지역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한 박춘무의 호국정신은, 국란에 직면했을 때 국민 된 도리가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다.
청주성 탈환 승리의 요인은 박춘무가 남문에서 조헌과 영규대사가 오기 전부터 접적 유지를 하며 왜군에게 곧 대병력이 올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심리전을 펼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 뒤 조헌과 영규대사는 서문을 공격하고 승리를 이끌었다.
참고자료: 청주의 역사와 사람들 (2009 청주문화원), 군사학으로 본 청주성전투 (2017 청주문화원)
시민의 시선으로 기록하다, [2023 시민에디터]는 문화도시 청주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주 미래유산 이야기를 시민에디터의 목소리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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