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1917~1990) 화백을 대표하는 말이다. 장욱진은 박수근·이중섭·김환기 등과 함께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2세대 서양화가이다. 가족, 나무, 새처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단순한 구도의 작품처럼 장욱진은 삶도 예술도 심플했다. 일생을 통틀어 직장생활은 8년, 그 시간을 제외하고 그의 삶은 온전히 그림으로 채워졌다. 자연을 닮고 그 자연을 그림에 담고 싶었던 화가 장욱진을 만나는 가장 근사한 방법은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찾는 것이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건물은 그의 대표작 ‘호작도(1984)’와 ‘장욱진식 집’을 모티브로 지어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호작도 속 호랑이가 걸어가는 모습이기도 하고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낯익은 집이 연상되기도 한다. 주변 산세, 계곡과 평행을 이루며 조화롭게 자리 잡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나는 심플하다”를 외쳤던 그의 철학을 응축해놓은 것 같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도에 동선은 치밀하고 안정적이다. 마치 그의 그림처럼.
해발 450m의 계명산 자락에 기대어 계곡을 곁에 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사시사철 아름답다. 봄가을엔 피크닉, 여름엔 물놀이도 가능한 열린 미술관을 지향한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자연 속에서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장욱진 화백의 작품과 삶을 그대로 담은 공간이다.
해 진 뒤 조명을 밝힌 미술관은 마치 그의 작품 속 낯익은 집을 연상케 한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장욱진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듯 1월 5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찾았다. 입구에서 표를 끊고 들어서면 넓은 장흥조각공원부터 만난다. 장흥조각공원에는 한국 구상조각의 거장 민복진(1927~2016)의 작품 ‘가족’ 시리즈를 비롯해 알록달록 실험적인 조각까지 국내외 작가 30여 명의 작품 4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장흥면 주민 전춘광 씨가 큰 수해를 입은 장흥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모은 돌로 세웠다는 커다란 탑도 흥미롭다. 다양한 조각작품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으로 가는 아치형 다리까지 이어진다.
눈 쌓인 장흥계곡 위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야트막한 언덕 위로 하얀색의 단정한 미술관이 나타난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격자창으로 파란 하늘이 반사되면서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담아낸다. 창과 대칭되는 시선엔 대형 야외 조각품인 나점수 작가의 ‘Here’가 마주하고 있다. 망원경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의 또 다른 볼거리다. 아치형 다리에서 바라보면 미술관 계단에 선 이들은 장욱진의 집 그림 속 인물처럼 보인다. 마치 장욱진의 그림 속으로 쑥 들어온 것 같다.
2023년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다시 보다 : 한국근현대미술전’에서 해설을 맡았던 ‘홀리데이 인 뮤지엄’의 저자 한이준 씨 역시 책을 통해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평생 욕심 없이 자연 속에서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장욱진의 작품과 삶을 그대로 담은 공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미술관 건물 하나, 나머지는 빛과 바람, 나무와 물소리가 여백을 채우고 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김수근건축상’ 수상을 시작으로 영국 ‘BBC’의 ‘위대한 8대 신설미술관’과 한국건축가협회의 ‘올해의 베스트7’에 선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23년 10월 발표한 ‘로컬100’에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지역 문화공간’에 이름을 올렸다.
上. 하늘에서 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장욱진 화백의 작품 ‘호작도’ 속 누워 있는 호랑이를 닮았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下. 장욱진의 따스한 작품을 실감 콘텐츠로 만나는 ‘가족이야기’
“로컬100 선정은 경기 양주시를 대표하는 문화예술기관임을 인정받고 나아가 우리나라가 내세울 만한 문화공간이 됐다는 의미로 미술관 입장에선 큰 전환점이라 생각합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진행되고 있는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2월 12일)’에 쏟아진 관심이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특별전시와 학술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계영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장의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양주시가 공동 주최한 장욱진 회고전은 개막 석 달째인 1월 중순 현재 관람객 2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이번 전시로 장욱진과 작품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로컬100까지 선정돼 겹경사 분위기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인구 26만 명의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설립·운영하는 미술관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상설전시장서 ‘새벽의 표정’전… 미공개작 4점 선보여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충남 연기군 출신의 장욱진이 양주와 무슨 연고가 있을까? 장욱진은 생전에 네 지역, 네 곳의 작업실에서 굵직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장욱진의 작품은 활동 시기에 따라 덕소·명륜동·수안보·용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중 1963년부터 1974년까지 12년 동안 작품 활동을 했던 덕소가 당시 행정구역상 양주군 미금면 삼패리(지금의 남양주시 삼패동)에 속했다. 그 작은 접점에서 출발해 개관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올해 4월이면 개관 10주년을 맞는다.
左.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상설전 ‘새벽의 표정’을 만날 수 있는 2층 상설전시실.
右.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맞은편에 이웃하고 있는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한국 구상조각 1세대 작가인 민복진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연간기획전 4회, 상설전 2회를 개최하고 있다. 현재 1층 기획전시실에선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입주작가의 전시 ‘커튼콜’이 열리고 있다. 777레지던스는 미술관이 신진 및 중견 작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6~8기 입주작가 14명이 참여한 ‘커튼콜’전은 2월 12일까지 열리며 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장흥 주민들과 협업한 새활용(업사이클링) 작품부터 회화,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관람객과 만난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여는 기획전들은 장욱진의 화풍, 정신세계와 교집합이 있는 작품으로 엄선한다. 이 관장은 “장욱진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전시, 장욱진의 예술세계와 통하는 지점이 있는 작가들까지 아우르는 기획전 등을 통해 작가미술관의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2층 상설전시장에서는 장욱진의 ‘새벽의 표정(~8월 18일)’전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장욱진의 인생관이 담긴 작품들로 구성됐다. 1980년대 완성한 미공개작 4점을 포함해 장욱진의 대표작 2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시끄러운 잡음과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은 싱싱한 새벽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닮고 싶다”고 했던 장욱진은 주로 새벽에 산책하며 주변의 자연물을 관찰하고 특징들을 포착했다. 이번 전시에선 그의 독특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목판화인 ‘마음이 멀어질 때 선 자리도 멀어진다(1995)’를 비롯해 ‘언덕길(1982)’, ‘가족도(1989)’, ‘자화상(1988)’, ‘가로수(1989)’ 등의 유화작품과 “새벽 맑을 때 먹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부채(1985)’ 작품도 볼 수 있다. 누구보다 가족을 아끼고 사랑했던 장욱진의 따스한 작품을 실감 콘텐츠로 만나는 ‘가족이야기’, 시기별 작품과 실시간 음성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장욱진 라이브러리’를 관람하고 나면 장욱진의 삶과 예술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다.
2022년 3월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장욱진과 민복진이라는 두 거장의 작품을 함께 만나기 위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양주 출신의 민복진은 한국 구상조각 1세대를 대표하는 조각가이다. 두 작가의 작품 모두 가족에 대한 사랑과 따뜻한 정서를 담고 있다. 두 미술관은 장흥조각공원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이 관장은 “한 가지 주제로 두 미술관을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라고 말했다. 한 장의 통합권으로 ‘장욱진+민복진 예술 산책’이 가능하다니 망설이면 손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