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적설(積雪)
'글. 이정연'

예년에 보기 드문 눈이 대구에 내렸다. 내 집 거실에 앉아 히말라야보다 더 아름답게 펼쳐진 먼 산의 설경을 감상하니 여왕처럼 행복하다. 이른 아침을 먹고 나니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러 가겠다고 장갑을 찾는다. 어제 저녁 한 켤레를 적셔 논 장갑이 저만치 세탁기 앞에 있고 큰 아이가 “어제 털장갑을 껴도 너무 손이 시렸어요.”한다. 아이들 체온에 눈이 녹으면 금방 젖으니 당연하다. 어른용 털장갑을 끼우고 비닐장갑을 덧 끼워 손목에 고무줄을 채워주었다.
두 아이의 등을 두드려 내려 보내고 나니 아득한 유년의 겨울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나 보다. 심심산골 마을엔 지겹도록 눈이 내렸다. 십리도 넘는 길을 걸어 학교에 가야하는 우리는 눈이나 비가 오면 큰일이었다. 이른 아침을 지어놓고 넉가래로 눈을 치우던 어머니가 좀 일찍 나서야겠다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우리를 깨우는데 문을 여니 세상이 한 점 티 없는 설국이었다. 아침 해가 비치는 산꼭대기가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사방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시래기 된장국으로 든든하게 밥을 먹고 책보를 허리에 단단히 동여맸다.





장독대를 절반이나 묻고 있는 눈을 보신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하면 얇은 고무신 안으로 눈이 들어와 양말이 모두 젖고 말텐데 하며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가 좋은 생각이 났다면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길쭉한 비닐봉지 네 개를 찾아 오셨다. 먼저 언니 고무신 위로 비닐봉지를 두 개씩을 덧신긴 후에 무릎 위를 고무줄로 묶고 창피하다고 떼를 쓰는 내게도 똑 같이 해 주셨다. 그리고 곱게 꼰 새끼줄을 발 중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매주시고 학교에 도착하면 풀라며 잘 다녀오라고 우리의 등을 두드리셨다.
겨울방학이 다 되도록 털신 한 켤레 사주지 않으시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고개 숙이는데 양말도 신지 않으신 어머니의 까만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과 산과 들이 온통 하얗게 하나가 된 길을 언니와 나는 산토끼처럼 뛰어갔다. 바람이 불면 길 나무에서 떨어지는 설편이 햇살 속에 은가루를 뿌리듯 눈부셨다. 아이들의 발자국이 가득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착한 교실 앞에서 새끼줄을 풀고 비닐을 벗겨 본 우리는 깜짝 놀랐다. 먼 길을 달려왔는데 비닐이 의외로 말짱했던 것이다. 닳고 닳은 고무신 위로 신겨 주셨던 비닐봉지는 푹신한 눈길 위에서 하나도 찢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우리의 발은 신발에조차 눈 한 점 묻지 않은 채 보송보송했다.
교실에 도착하니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조개탄 난로 옆에 죽 둘러 선 아이들이 부츠를 벗어 말리는데 쌓인 눈이 들어가서 녹는 바람에 부츠 속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발을 거꾸로 들고 난로에 말리는 아이, 여분으로 가져온 양말을 갈아 신는 아이로 교실은 온통 소란했다. 난로 주위에 맨발로 늘어선 아이들의 등을 보며 나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무사히 네 시간의 수업을 마친 하교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발에 눈이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집에 가면 아랫목을 따뜻하게 데워 두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릴 어머니가 계시므로…….





아이들이 눈을 뭉쳐 서로 던지며 뒹굴고 노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예쁘다. 아이아빠와 먼 산의 눈을 보며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아이들이 들어왔다. 뽀얀 얼굴이 막 불어 놓은 풍선처럼 팽팽하다. "어머니, 어머니는 정말 짱이에요. 하나도 손 시리지 않았어요. 어떻게 이런 좋은 생각이 났어요?" 한 옥타브 올라간 아이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톡톡 터지는 비눗방울 같이 가볍다. "외할머니가 가르쳐 주셨어 엄마 어릴 때 외할머니도 그렇게 해 주셨거든......." 아이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내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이 눈싸움의 즐거움은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닐봉지를 구겨서 교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언니는 곱게 다시 접어서 책보에 싸왔다. 그렇게 폭설이 내린 저녁이면 부엉이도 울지 않았다. 우린 비닐봉지 이야기를 호롱불 밑에 둘러앉아 신나게 떠들었다. 누구는 만날 털신 자랑을 했는데 집에 올 때까지도 신이 덜 말라 양말을 갈아 신어도 소용이 없었고 누구의 양말은 구멍이 났고 하면서 밤이 깊은 줄 몰랐다. 설해목 부러지는 메아리만 골짜기를 울릴 뿐 산골의 밤은 고요하고 너울거리는 호롱불 아래 우릴 흐뭇하게 내려다보시는 어머니의 눈빛이 그윽했다. 오늘처럼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윗목 왕겨 속에 묻어 두었던 고구마를 깎아 먹던 겨울밤 어머니 그 따스한 지혜의 손이 그립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그 때 생각이 나고 가난과 불행이 늘 함께 있는 것만은 아니구나 싶어진다.

EDITOR 편집팀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