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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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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청춘, 어른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 ” 故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래가사 일부이다. 문화가 시대를 대변하듯 1994년 발표된 김광석 4집 앨범 수록곡 ‘서른 즈음에’는 그 당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 김광석의 마음뿐 만 아니라 동시대의 청년들을 대변해주는 곡일 것이다. 김광석은 어느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일정부분 포기하고 일정부분 인정하고 그렇게 지내다보면 나이에 ‘ㄴ’이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그때쯤 되면 스스로의 한계도 인정해야 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그렇게 재미있거나 신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답답함 재미없음. 그 즈음에 그 나이 즈음에 모두들 비슷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더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래가 발표된 1994년 전후는 어떤 시기였을까. 군사정부가 막을 내리고 최초의 문민정부가 출범하였고 제 1차 수능이 실시되었으며, 일재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개칭, 대전엑스포 개최, 상품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1세대 아이돌가수의 데뷔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사회?문화?정치?경제를 포함한 모든 국가요소전반에 있어서 격동적인 전환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어림잡아 현재 20대 중후반, 30대 전후의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1990년대의 청년으로 살아가며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가족이나 직장동료 등 누군가의 삶을 책임져야 했고 당면한 과제들을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어른’이지 않았을까. 그 시기의 서른 살 청년 김광석은 청춘의 세월은 지나가고 지난날을 회고하듯 ‘허무’를 읊조린다.




철 좀 들어라, 나잇값 좀 해라

앞서 말한바와 같이 문화가 시대를 반영한다면 40~50이 넘어도 아직도 철부지 같은 아들들의 성장기를 다룬 ‘미운우리새끼’, 파일럿으로 방영되었지만 40대가 된 가장이 무게를 내려놓고 가출한다는 ‘사십춘기’, 평균연령 40대의 좌충우돌 리얼 버라이어티 ‘무한도전’과 ‘1박2일’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흥행이 현 시대상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절제와 격식보다 조금 더 자유로움을, 과거의 허무보다 현재의 최선을, 그들이 방송을 통해 보여주는 일종의 미성숙함, 어른스럽지 못함에 우리를 투영해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 평균 이하임을 자처하는 남자들이 매주 새로운 상황 속에서 펼치는 좌충우돌 도전기’라는 무한도전의 캐치 프레이즈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 키덜트(Kidult)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2000년대 초반에만 하더라도 키덜트 문화라고 하면 ‘정신적 퇴행’이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해 소수의, 미성숙한, 비주류 문화로 간주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히어로 영화나 인기리에 방영, 출간중인 만화캐릭터에 관련된 피규어, 옷, 각종 상품 등의 재화적 가치, 판매량만 보더라도 현재 키덜트 문화는 주류 문화로의 자리매김 중이다. 그렇다면 현 시대의 키덜트 문화의 수요자들이 증가하는 것을 ‘정신적 퇴행’을 겪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인구의 급증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복고열풍’의 일종일 수도 있으며, 조립식 키트에 있어서는 어린아이들의 그것과는 다른 성인들의 ‘전문적 영역’이라고 할 수 도 있고, 개성을 중시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지향일 수도 있다. 때론, 성인이 겪고 있는 삶의 무게감에 대한 가벼운 일탈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현실을 도피해서 네버랜드도 떠나는 피터팬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덜트라는 문화적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는 ‘철 좀 들어라, 나잇값 좀 해라’라고 말하곤 한다.


2017년 청년, 아직

지난해 말 신호대기를 받던 중 뒤에 오는 차량에 의해 필자의 차가 들이받히는 사고가 있었다. 갑작스런 사고에 머릿속이 멍해졌다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내려서 사과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사고현장에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던데 차량통행이 많은 사거리에서 다른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복잡해졌고 당황했는지 휴대폰을 들고 내리다가 떨어뜨린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은 머릿속에선 문득 ‘이런 내가 서른이라니’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1964년생 김광석은 1994년 서른 즈음에 열심히 달려온 자취를 돌아보았을 때의 허무를 이야기 하는 듯하다. 하지만 1987년생 필자는 2017년 서른 즈음의 청년이 되었고 사회적으로도 본인 스스로도 미완의 자신을 다그치며 전진을 강요한다. 20여 년 전의 30대가 어른에 속했었다면 지금의 30대는 어른에 가까워짐 정도가 아닐까.
필자에게 있어서 ‘철 든다는 것, 나잇값을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험에서 오는 마음과 동작에 있어서 ‘여유’가 생긴다는 것과 상통한다. 기성세대는 당시 20대 초중반에 사회에 진출하고 우리보다 7-8년의 시간을 먼저 경험하였다. 우린 그 시절 청춘들보다 늦게 사회에 나왔고 늦게 가정을 이룰 것이며 더 오래 살아갈 것이다. 그 시절 청춘들이 치열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성취에 대한 허무를 이야기했다면 우린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있는 그대로를 만끽하면 되지 않을까. 본인의 불완전함을 자책하고 채찍질 하지 말자. 누군가에게 소위 어른스럽지 못하게 보여짐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모르는 것을 애써 아는 척 할 필요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경험이 우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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