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지리산의 품에서
'글. 이정연'

산행 시작 장소 중산리에 도착하니 저 멀리 천왕봉이 보이고 엷은 운해에 가려져 있다. 두근거리는 가슴, 오래전 잃어버렸던 느낌이다.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고 보니 세상 모든 일에 무덤덤하다. 아무런 설렘이 없는 날들의 연속,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났으면 싶었다. 매일 같은 일상으로는 생각마저도 단조로워진다. 뻔한 하루에서 벗어나는 일은 우선 나를 어딘가로 옮겨놓은 일이다. 새로운 것을 보면 생각은 보이는 대로 새로워질 것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는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일이 있었다. 잘 가는 인터넷 사이트 중에 ‘지구별에서 추억 만들기’라는 스토리가 있다. 국내의 여러 곳을 여행하거나 산행 후 그 느낌과 사진을 곁들여 상세히 올려서 소개하는 곳인데 자주 산행할 수 없는 내겐 더없이 위로되는 사이트다. 매주 한두 번 소개되는 산행기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 산에 가 보아야지 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얼마 전 이 사이트에 지리산 천왕봉 산행기가 올라왔고 대구에서 당일로, 그것도 이른 시간에 다녀오신 것이다. 지리산은 1박 2일 정도 산장에 머물며 올라야 정상 천왕봉엘 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당일에 다녀올 수 있다니 그럼 나도 얼른 가 보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월급쟁이의 정해진 휴가 일수로는 도저히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육지의 최고봉 어머니의 품속 같은 지리산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산행 결심을 하고 나자 내 머릿속은 온통 천왕봉뿐 마음은 이미 천왕봉에 가 있었다. 우리가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 후에는 할까 말까 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쏟던 에너지를 온전히 성취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으로 가보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에너지는 온통 그 실행에 집중되었다. 세수하면서도 거울 속의 내 눈빛에다 ‘천왕봉 잊지 않았지?’ 약속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지리산 지리산 하자 남편이 “그렇게 가고 싶으면 미룰 거 뭐 있어 가야지!” 그래서 얼떨결에 출발하게 되었다.
도착해 보니 어머니의 산이란 온정어린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음식점 카페 숙박업소 기념품점이 지리산 그늘에 있다. 넉넉한 산의 품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주중이라 산행객들은 많지 않았다. 산행 모임에서 온 분들이 넷, 우리 부부, 그리고 또 다른 부부 한 쌍이 순두류까지 가는 버스 탑승객의 전부였다. 순두류에서 버스를 내리고 등산 시작 로타리대피소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다. 처음 얼마간은 완만한 등산로다. 조릿대가 온통 산을 점령하고 어릴 때 학교 가던 길처럼 편안하다. 숲 그늘에 덥지 않은 등산로가 좋다. 등산로 가장자리에 온통 피나물 노란 꽃이 피어 어린 병사들처럼 도열했고 어느 지점에선 연분홍 철쭉꽃이 점점이 떨어져 어디에 발을 놓아야 할지 몰랐다. 새하얀 함박꽃이 탐스럽게 피기 시작하고 당조팝나무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요즘 축복하는 말 중에 “꽃길만 걸으세요.” 하는 말이 있는데 나는 정말로 호젓한 꽃길을 혼자 온전히 누리며 걷고 있다.



처음 집에서 출발할 때 스스로 일렀다. 오늘 정상에 가지 못해도 무리해서 욕심내거나 실망하지 말자. 그냥 먼발치에서 천왕봉을 올려다보는 것 그것도 좋은 일이지. 산꾼들이 흔히 하는 우스개 중에 “산이 어디 가나 다음에 또 오면 되지.” 하는 말을 기억하며 한 발 한 발 기도하듯 올랐다.
로타리대피소와 법계사를 지났다. 얼마나 올랐을까 숲 그늘을 벗어나니 햇볕도 따갑고 숨도 찼다. 기상청 예보로는 오늘 기온이 35도라고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머리를 감은 것처럼 축축하다. 땀이 나고 바람에 마르고 그러다 보니 목과 얼굴에 소금이 다 생겼다. 앞서가던 남편의 산행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숨소리도 거칠다. 다행인 것은 저만치 운해에 반쯤 가린 천왕봉이 보인다.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이 수려하다. 지친 산행객에게 목적지가 보인다는 것 그것보다 더한 위로가 있을까. 정상이 보이자 더욱 급해지는 마음, 그래도 자칫 탈진할 수 있을 것 같아 천천히 힘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긴다. 내가 내딛는 보폭만큼 정상에 가까워진다는 변함없이 분명한 사실만 기억하며 오직 나를 천왕봉 그 그리던 장소에 틀림없이 올려놓고 싶다.
높이 오를수록 연초록 어린 새잎이 돋아나는 나무가 보인다. 청신한 기운이 물씬 나는 산 어깨쯤 운해가 머물다가 천천히 흩어지고 철쭉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발목을 조여 오는 신발 끈은 조금 늦추고 배낭끈은 조여 바투 메고 마지막 경사를 오른다. 이미 급경사 계단을 내려오는 분이 계셔 잠시 멈추고 뒤를 본다. 여기저기 흩어진 운해가 바람결에 모이고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또 사라진다. 나는 늘 아래서 구름을 아득히 올려다보았는데 지금 나는 구름을 내려다본다.



마침내 천왕봉 정상에 도착했다. 준수한 정상의 모습, 여기저기 흩어진 바위 군락이 멋지다. 이미 도착한 산행객이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찍고 몇몇 사람은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시원한 바람, 추울까 봐 바람막이를 가져왔지만 반소매 옷이 상쾌하다. 정상석 곁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가장 풍경이 좋은 곳을 향해 앉아 김밥을 먹었다. 저만치 바위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너만 먹니?’ 시위하듯 눈앞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혹시나 하고 사과를 조금 떼어 던져 주었더니 저쪽 바위에 앉았던 까마귀가 용케 보았다. 날카로운 포물선을 그리며 수직으로 내리꽂힐 듯이 사과 조각을 물고 날아오른다.
뭔가 얻으려면 미루지 말고 일단 구체적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평생 꿈만 꾸다가, 그림만 그리다가 주저앉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선 먼저 배낭을 꾸리고 현관문을 나서야 한다. 구름 바람 새와 함께 하는 하늘정원에서의 오찬, 행복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일망무제, 저 아래로 구름이 흐르고 가깝고 또 먼 산이 꿈속의 풍경처럼 아득하다. 구름 사이로 시원스레 뻗어 내린 산등성이는 장엄하고 그 끝에 품에 안기듯 크고 작은 집이 정겹다. 하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 두고 오래오래 정상에 머물고 싶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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