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썰매
'글. 이정연'

일 때문에 나갔다가 천내천 갓길을 지날 때였다. 아빠가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앉은뱅이 썰매를 타는데 아이들이 자지러질 듯이 즐거워했다. 요즘도 저렇게 놀아주는 아빠가 있구나! 기분 좋아서 한참 쳐다보았다. 카메라가 있으면 저 환한 웃음을 단란한 행복을 담고 싶다.
나도 어릴 때 겨울방학은 썰매 타는 일로 다 보냈다. 썰매는 남자아이들이 많이 탔지만 나도 타고 싶어 오빠한테 썰매 하나 만들어 달라고 졸라 보았다. 예상대로 오빠는 계집애가 무슨 썰매를 타느냐며 일언지하에 무시해 버렸다. 남자아이들 못지않게 호기심 많았던 나는 직접 썰매를 만들기로 했다.
집에 굴러다니는 판자 조각과 장작더미에서 바퀴로 쓸 적당한 나무를 찾았다. 굵은 철사가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 공구 망태 속에는 가는 철사가 한 묶음 있을 뿐 아무리 찾아도 굵은 철사는 없었다. 여기저기 철사를 찾아다니던 나는 마침 좋은 걸 발견했다. 양동이 손잡이였다. 저걸 떼 내서 썰매 바퀴에 달고 손잡이는 가는 철사 몇 가닥을 꼬아서 새로 달면 문제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 공구 망태 속에는 없는 게 없었다. 펜치 니퍼 장도리 망치 톱 썰매 만들 때 필요한 공구가 다 있었다.
여러 날 걸려 남자아이들이 타는 썰매랑 비슷하게 만들었다. 얼음판에 놓고 밀어보니 다른 아이들 썰매는 잘 나가는데 내 썰매는 제 자리에서 조금 가다가 옆으로 돌며 나가지 않았다. 친한 남자아이를 불러 내 썰매는 왜 안 나가느냐고 물어보았다, 친구가 썰매를 뒤집어 보더니, 철사가 이렇게 녹이 슬어서 안 나간다고 했다. 나는 거친 땅에다 놓고 썰매를 열심히 문질렀다. 얼마나 열심히 문질렀는지 녹슨 철사가 은빛으로 윤이 났다. 밤에 혼자 나가 얼음 언 논에서 썰매를 놓고 살짝 밀어보니 논 저 끝까지 단숨에 밀려갔다. 너무 좋아서 혼자 얼음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내 모습은 달도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아차 썰매 만드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만 짚개 창 만드는 걸 잊어버렸다. 그게 있어야 균형을 잡고 속력을 내서 탈 수 있는데……. 썰매는 보고 그런대로 만들 수 있는데 창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손잡이에 못을 박은 건 틀림없는데 머리가 있는 못을 어떻게 그렇게 만드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나는 또 친구를 불러 물어보았다. 친구는 내 창은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는데 그건 네가 도저히 못 만들 거라고 했다. 그래도 만들어 볼 거니까 어떻게 만드는지 방법만 좀 알려 달라고 했다. 창은 우선 적당한 굵기의 쭉 곧은 소나무를 베어 와서 다듬어 놓고 대못 머리를 아궁이에 달군 뒤에 망치로 두들겨 못 머리를 떼 내고 달궈진 상태 그대로 나무 박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내게 쉽지 않은 일은 없었다. 오늘 안 되면 내일까지 내일도 안 되면 모레까지 나는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건 끝까지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친구가 알려 준 대로 산에 가서 내 손에 잡기 좋을 만한 크기의 소나를 베어오고 낫으로 다듬고 하여 한 쌍의 예쁜 창 손잡이를 만들어 두고 대못을 꺼내 쇠죽 솥 아궁이에 달구고 그걸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 돌에 놓고 망치로 두드려 못 머리를 떼어내고 천신만고 끝에 손잡이에 박는 일까지 성공했다. 길이가 약간 짝짝이인 것과 못이 조금 구부러지긴 했지만 내가 균형을 잡고 썰매를 타기에는 문제없었다.
며칠 지나 우물에 물 길어 가려고 양동이를 보신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양동이 손잡이가 감쪽같이 없어진 거다. 양동이 손잡이부터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썰매를 갖고 싶은 열망 때문에 깜빡 잊어버렸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아버지한테 양동이 손잡이 행방을 물어보고 모른다고 하시자 이번에는 오빠한테 어쨌냐고 다그치셨다. 어머니는 내가 그런 짓을 한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하셨다. 썰매는 타고나면 늘 볏짚 낟가리에서 한 단을 빼낸 자리에 잘 숨겨두었기 마련이지 크게 혼날 뻔했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조심조심 가는 철사 몇 가닥을 꼬아 양동이 손잡이도 만들어 두었다. 며칠 뒤 어머니는 “우리 집에는 굵은 철사는 훔쳐 가고 대신 가는 철사를 가져다 놓는 이상한 귀신이 온다.”고 하셨다. 그러실 때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는 척했지만 내 소행이라는 걸 모르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비료 포대에 짚을 넣어 썰매 대용으로 타다가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쳐서 온 얼굴에 상처가 나고 썰매를 만드느라 망치로 손가락을 쳐서 퉁퉁 부은 내 손가락을 모두 다 보셨기 때문이다. 내일은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막내딸, 내 마음은 들여다보지 못하셨지만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다 알고 계셨다.
겨울이면 배꼽마당 앞 빈 논에 물을 채우고 얼려,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주셨던 고향마을의 어른들이 그립다. 해 질 무렵 낮은 울타리 너머로 누구야 밥 먹어라 부르던 어머니 목소리, 구멍 난 바지 들킬세라 조심조심 집으로 가던 개구쟁이 동무들, 썰매 하나만 있으면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하던 그때 그 순진한 천사들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한 학원이 끝나면 바로 다른 학원의 차를 받아 타는 아이들의 가방을 보면 내 어깨가 다 무겁다. 눈만 뜨면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놀던 나도 내 동무들도 다들 삼시 세끼 밥 잘 먹고 안 헐벗고 잘만 사는데…….

EDITOR AE안은하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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