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아! 옛날이여
'글. 박순철'

소갈 씨가 등 떠밀려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옆에는 부끄러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던, 꽃처럼 곱고 수줍던 새색시가 아닌, 든든한 동반자가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다.
고희를 맞은 소갈 씨를 위해 조촐한 저녁상이 준비되었다. 아내 생일은 물론 자신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해서 지청구 듣기가 일쑤이고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는 주인공인 소갈 씨가 덤덤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다. 이번 집안 모임은 며느리와 딸이 앞장서 주선했다. 아들딸 삼 남매 가족이 다 모였으나 고작 15명에 불과하다.
며느리와 딸이 권하는 술을 먹고 얼큰해졌을 때 사위가 2박 3일 제주 여행 티켓을 내밀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집콕’이 대수이긴 하지만, 제주도는 청정지역이니 다녀오라는 거였다. 그 뜻이 고맙기도 하고 1년 가까이 나들이 한번 못하고 갇혀 지낸 답답함을 풀어 줄 기회라 생각되어 못이기는 척 나선 길이다.



제주도 여행을 몇 번이나 다녀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게 제주도였다. 소갈 씨는 기억의 창고를 모두 뒤져 제주도로 신혼여행 왔을 때를 찾아냈다. 당시는 육지에 사는 사람이, 그것도 내륙의 중심에 있는 충청도에서 제주도를 가려면 무척 힘들었다. 뱃삯은 저렴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더구나 멀미가 심한 사람들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비행기 요금도 무척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가진 사람들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별 어려움 없겠지만, 소갈 씨 같은 소시민에게는 벅찬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청주 공항이 생겨서 내륙에서도 편리하게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지만, 소갈 씨가 신혼여행을 갈 때만 해도 광주나 김포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광주에서 출발하는 게 요금이 더 저렴해서 광주까지 고속버스를, 다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번거로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간다는 게 꿈만 같았다.
신랑 신부 모두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는 신기하기만 했다. 두려움에 소갈 씨의 팔을 꼭 붙잡고 있는 새신부가 그저 꽃같이 아름답기만 했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에도 눈을 감고 울렁거리는 속을 안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소갈 씨도 잔뜩 긴장한 탓에 제대로 밖을 내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창가 좌석에 앉았기에 얼마 뒤에는 조그마한 창을 통해 펼쳐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차츰 울렁거리던 가슴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리산과 무등산이 어디쯤일까 가늠해보려 애썼지만, 어렴풋이나마 백두대간의 모습이란 걸 느끼게만 할 뿐 커다란 산맥에서 특정 지역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새신랑 신부를 태운 비행기는 이내 검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망망대해로 접어들었다. 커다란 섬들이 조그마한 닭둥우리처럼 보였다. 뭉게구름도 마치 포근한 양탄자 같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양털을 깔아야 저처럼 아름답고 포근한 침구가 될까 저런 양탄자를 깔고 잠을 잔다면 하루의 피로가 아니라 늘 묵직하게 다가오는 마음의 짐까지 단번에 날아갈 것 같았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개미허리같이 늘씬한 승무원들이 카트에 음료수를 싣고 다가와 무엇을 드시겠느냐며 생글생글 웃는다. 그 모습이 마치 천사같이 느껴졌다. ‘내 색시도 저런 옷을 입혀 놓으면 저보다 더 예쁠 텐데….’하는 생각에 넋 놓고 바라보는 소갈 씨가 민망했는지 신부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아! 커피 주세요.”
“네, 블랙으로 드릴까요?”
“네.”
“웬일! 커피 안 좋아하더니?”
새침하게 앉아있던 신부가 끼어들었다.
“오늘은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그래.”
그 말이 스튜어디스의 감성을 자극했나 보다.
“그럼 설탕 넣어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그냥 블랙으로 주세요.”
신부 말을 들었으면 좋았으련만, 지금도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는 소갈 씨! 당시에는 블랙커피 마시는 사람을 좀 고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흉내를 내려다가 쓴 커피 한잔 다 마시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광주를 이륙한 지 40여 분 지났는데 어느새 앞을 가로막는 구름에 쌓인 한라산이 나타나고 제주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제주도는 남의 나라 같았다. 육지의 소나무보다 더 큰 야자수 나무가 거리 곳곳에서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 교육까지 마칠 수 있다고 하는 감귤 농장이 즐비했다.
대기하고 있던 택시는 신혼부부를 태우고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와 예약해놓은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K호텔로 달렸다. 피곤함도 잊은 채 짐을 풀자마자 이내 제주 관광에 나섰다.
천지연 폭포와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왔다. 버스와 비행기를 타느라 피곤한 몸을 쉬려고 서둘러 돌아온 게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마셨다는 시바스 리갈을 비롯해 양주와 맥주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마침 목도 컬컬하던 참이어서 웬 떡인가 싶었다. 맥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바스 리갈을 꺼내 들었다.
생전 처음 마셔본 양주는 목구멍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했다. 선대부터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간다’라는 부주가 어디 가겠는가. 달달한 감귤과 포도를 안주 삼아 몇 잔을 마시고는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신부는 말도 하지 않는다. 토라진 신부 달래느라 적잖이 애쓰던 기억도 아슴아슴하게 떠오른다.
꿈같은 신혼여행 마지막 날 호텔을 떠나려고 객실 키를 프런트에 반납하자 계산서를 내민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자신이 첫날 마신 양주와 과일값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상상외로 큰 금액이었다.
‘공짜인 줄 알고 마셨는데….’
‘무슨 양주값이 이렇게 많이….’
한참이나 지켜보던 신부가 핸드백에서 꺼내주는 비상금으로 양주값을 물어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희라니 꿈만 같다. 그때는 꽃같이 예쁘고 순한 양 같던 그의 신부도 이제는 펑퍼짐한 여인으로 변해 있으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위가 예약한 숙박지는 신혼여행을 왔던 그 K호텔이었다. 그날처럼 양주가 들어있나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으나 맥주도 양주도 아닌 달랑 생수 두 병뿐이었다.
“이런!”
“당신! 오늘은 우리 신혼여행 왔을 때처럼 양주 마시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때는 뭘 몰라서 그랬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요.”
“맞아요. 당신이 술값 못 내서 쩔쩔매던 모습도 어제처럼 생생하네요.”
소갈 씨나 그의 아내나 옛날을 그리워했지만 한번 흘러간 세월은 다시 오지 않으니 이 일을 어쩌랴. 젊어서는 꿈을,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더니만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보다.

EDITOR AE안은하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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