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생짜배기
'글. 박종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흙구덩이에서 꺼내놓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무를 보면 왠지 자꾸 시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란 환경이 달라서인지 시댁에 가면 모든 게 낯설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댁에 갔을 때였다.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들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 앞에 펼쳐진 부엌은 아주 어렸을 적에나 봤음 직한 구식 부엌이었다.
순간, 새 사람을 격하게 반기듯 입이 찢어지라 웃는 것이 있었다. 마치, 쇠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한 아궁이를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세월의 더께로 윤기 잃은 가마솥과 넙데데한 나무 주걱 등, 부엌살림을 훑느라 잠깐 방심하는 사이 한쪽 발이 허방다리를 짚을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보니 아궁이 앞이 둥그스름하게 패여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낭패를 볼 뻔했던 반질반질한 흙바닥은 바로, 인고의 시간을 말해주는 어머니의 자리였다.
며느리를 들이며 서둘러 폐업 신고를 마친 부엌은 스산스러웠다. 수북하게 쌓인 땔감 사이에 얹힌 솥단지마다 골마지가 가득했다. 어머니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을지 그것들이 다 말해주는 듯했다.



손 놓을 곳을 몰라 서성이는데 어머니가 나오시고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부엌을 덮었다. 어머니와 실랑이하던 장작불이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벌건 숯덩이가 죄인처럼 끌려 나왔다. 어머니는그 위에 삼발이를 놓고 된장 푼 냄비를 앉혔다. 별스러운 것도 없이 어슷어슷 빚은 무와 호박고지를 넣고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뚜껑을 덮었다. 된장찌개에 들어간 것은 그게 다였다.
부엌은 안사람을 닮는다더니 어머니 모습 그대로인 그야말로 생짜배기 부엌이었다. 어머니의 찬장에는 먹다 남은 다시다 한 봉지도 없었다. 없는 것이 어디 다시다뿐이랴. 부엌에서 인공적인 것은 당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장을 모르는 어머니 모습처럼 생김 그대로인 무, 배추, 파, 마늘뿐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들의 애장품인 미원 한 숟가락도 없는 찬장은 수다스럽거나 보탤 줄도 몰랐다.
어머니는 가난한 집 육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근근이 끼니를 이으며 살던 어머니는 부모님의 중매로 이웃 마을 청년과 혼인했다. 얼굴도 못 보고 시집왔지만 훤칠하게 잘생긴 남편은 사범대를 졸업한 중등학교 교사였다.
양가 어르신들의 약조로 신부를 맞이한 아버님은 어머니한테 데면데면했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신혼 생활도 담백하게 시작했다. 남편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사는 어머니는 새댁 때부터 몸빼 바지 하나로 계절을 났다. 비단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는 사시는 동안 인스턴트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사이다, 콜라, 주스같이 흔한 음료수 한 잔 안 드셨다.
매일 밥상에 오르는 부식도 한결같았다. 콩나물, 두부, 호박 등 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자식 같은 채소들뿐이었다. 그나마도 어머니한테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부엌 한쪽 구덩이에 묻어 둔 생무였다. 몸뚱이 하나로 모진 세월을 살아 내던 어머니를 닮아서였을까. 어머니는 모양 없고 촌스럽게 생긴 무가 얼까 봐 구덩이에 묻고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짚으로 단단히 덮어주었다.
흙 속에서 겨울을 난 무는 생으로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았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처럼 위장을 따뜻하게 다스려주었다. 아버님의 잔소리가 길어지는 날이면 어머니는 무를 삐져 입에 넣고 오래도록 되새김질했다. 그것도 싫증나면 손가락만 한 크기로 썰어 무말랭이를 만들거나 큼지막하게 잘라 된장 항아리에 처박아 두기도 했다.
무는 어머니의 화풀이 대상뿐만이 아니라 집안의 비상약이기도 했다. 급체로 배앓이 할 때도 무가 특효였다. 생무를 갈아먹으면 마치, 어머니가 손으로 배를 문질러주는 것처럼 체기가 내려갔다. 기침이 심할 때는 꿀 넣고 삶은 무를 먹으면 기침이 멎었다. 보기에는 투박하고 고집스러운 생무가 긴긴 겨울밤 식구들의 군입거리로도 그만이었다.
하나, 무가 늘 단맛만 냈을까. 아버님의 술주정이 늘어나면 머리를 질끈 묶고 누워 시위하시는 어머니처럼 무도 가끔 골을 부렸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잘못을 다스릴 때는 무의 알싸한 매운맛처럼 따끔하게 매를 드셨다. 본래 순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고 무의 톡 쏘는 매운맛 때문에 한 번씩 혼이 날 때면 눈물을 쏙 빼기도 했다.
평생 치장 한 번 못하고 사셨던 어머니의 인생을 생각하면 흙 묻은 무가 떠오른다. 어머니라고 왜, 고운 옷 입고 호강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박봉인 교사 월급으로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 낯내주며 사느라 당신 몸은 늘 뒷전이었다.



어릴 때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몸빼바지 입은 어머니를 창피하다고 여기던 자식들이 요즘 들어 부쩍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김칫국물 묻은 책을 내던지며 소갈딱지 없게 굴어도 가타부타 않던 어머니가 끓여주신 칼칼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단다. 군내 나던 묵은지에 뭉툭 뭉툭 두부를 썰어 넣어 어머니 냄새가 나던 두부 김치찌개. 질리도록 먹어 보기 싫다고 타박하던 남편이 어머니가 해주시던 김치찌개를 생각해내는 것은 무슨 심사(心思)일지.
그렇게 담백했던 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어머니 마음처럼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무도 유행을 타나 보다. 마트에 가면 자색, 분홍색, 빨강 색 무가 심심찮게 보인다. 예쁜 색깔만큼이나 성질도 변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젊은 엄마들은 예전 우리의 어머니들과는 사뭇 다르다. 경쟁 사회에 걸맞게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심이 어머니 마음조차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세월이 변하고 식탁 풍경이 바뀌어도 나는 생짜 무가 좋다. 평생 유행 타지 않는 어머니 마음처럼 생긴 대로 있는 흙 묻은 무 말이다. 누가 생짜를 단순하다고만 할 것인가. 속없이 단순한 것 같지만 누구도 헤아리지 못할 깊은 속내와 넓은 아량을 가진 것이 생짜들이다. 음식에 들어가 다른 재료의 낯을 내주는 무가 그랬고 당신 모습을 지우며 자식 낯내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랬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생짜배기라는 단어가 수식어처럼 먼저 떠오른다. 평생 민얼굴에 몸빼바지 하나로 사셔서 다소 촌스럽지만,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은 분이셨던 어머니. 꾸밀 줄 몰라 더 안쓰럽던 생짜 어머니가 그립다.

EDITOR AE류정미
박종희 작가
이메일 : essay0228@hanmail.net
2000년 『월간문학세계』수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전국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김포문학상
201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제1회 119 문화상 소설 최우수상 수상 외 다수
2008년 ~ 2019년까지 중부매일, 충북일보, 충청매일에 수필 연재
저서: 수필집 『가리개』『출가』
한국작가회의, 한국산문작가협회, 충북작가회의 회원
청주시, 세종시 수필창작 강사.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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