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고양이
'글. 이정연'

퇴근길 화단 앞에 주차하고 있을 때였다. 흑백의 대비가 깨끗한 털을 가진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웅크려 땅을 파고 있었다. 먹잇감을 사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동화에서처럼 은화라도 묻어 둔 것일까?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녀석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릴 때 선생님 심부름 갔다가 우연히 숙직실에서 발견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검은 고양이가 눈에 띄어 책에 빠져들었고, 그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집에 간 이후로 고양이는 내게 피해 가야 할 운명의 존재가 되었다. 쥐를 물고 뒤란에서 나오는 고양이와 마주쳐도 기겁을 했고, 늦여름 스산한 바람 소리에 섞여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더욱 소름 끼쳤다. 울타리 저편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마치 슬프게 울부짖는 어린 아기의 원혼 같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기르던 가축을 식구처럼 돌보던 어머니조차 그럴 때는 기어이 멀리 쫓아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결정적으로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먹잇감을 사냥했으면 그냥 빨리 죽일 일이지 먹지도 않으면서 생명을 장난감으로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고양이 앞에 쥐’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고양이에 대한 기억은 자라서도 마찬가지였다. 야간운전을 하는 내차 앞에서 눈에 헤드라이트보다 더 위협적인 불을 켜고 길을 막는 것도 고양이였고, 정성 들여 부쳐 장독대에 올려놓았던 생선전을 훔쳐 먹어 나를 어쩔 줄 모르게 했던 녀석도 고양이였다. 그뿐이 아니라 녀석의 종족들은 하나같이 얄미운 짓만 골라 했다. 어디서건 마주치면 길을 비켜줄 생각은 않고 빤히 올려다보는 자세가 마치 내 마음속의 비호감을 낱낱이 읽어내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럴 때는 좀 작고 만만한 녀석이면 발을 굴러 쫓아버리고 콧수염이 뻣뻣한 크고 사납게 생긴 녀석이면 지나가는 사람에 묻혀 슬며시 피해 다녔다.



그런데 오늘 마주친 고양이는 지금까지의 녀석들과는 어딘지 좀 달랐다. 나를 힐끗 보더니 이내 다시 살금살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제 볼일에 열중한 나머지 내게 관심을 두지 않은 건지, 이미 나를 다 알고 있는 터라 무시하는 건지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녀석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는데, 잠시 뒤에 땅을 파던 흑백이 녀석이 몸을 동그랗게 옹크리고 파 둔 구덩이에 배변을 했다.
그럼 그렇지 난데없이 은화 운운하며 동화를 상상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내리려고 하다 잠시 멈추었다. 아무리 싫어하는 동물이지만 배설 도중 쫓겨나게 하는 건 아무래도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그 작은 몸에서 나온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배설을 했다. 참으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종족이었다. 머리 위로 휙 담장을 뛰어넘는 무례함도 모자라 이제 저 작은 녀석까지 똥을 싸대며 나를 무시하다니 네 녀석과 사느니 차라리 쥐와 함께 사는 게 더 낫겠다.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기다리는데 배설을 마친 녀석이 살짝 뒤돌아서더니 파놓은 흙으로 배설물을 묻는 게 아닌가. 몇 번 그렇게 하더니 코를 대고 냄새를 맡다가 또 몇 번을 더 그렇게 흙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냄새를 맡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내 쪽을 보며 눈을 한 번 깜빡했다. 은밀하게 배설을 마치고 증거까지 완벽하게 없앤 후 개운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새침데기 숙녀같이 우아하게 걸어갔다.
여름, 산과 들 계곡에서 사람들이 함부로 배설해 놓은 끔찍한 기억 때문에 고양이의 에티켓 앞에 나는 작은 충격에 휩싸였다. 노란 바탕에 한 줄기 빛을 예리하게 그어 놓은 보석 캐츠아이 같은 눈을 깜빡이며 여전히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나를 간단히 무시하고 발걸음도 사뿐사뿐 떠나 버렸다. 녀석은 지금까지 내가 오래도록 잘못 생각한 것을 ‘네 생각이 바로 오물이야.’ 하듯 배변 한 번 하는 짧은 시간에 깨우쳐 주고 사라져 버렸다.
녀석의 행동이 하도 깜찍하고 예뻐서 집에 와서 고양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어미 고양이는 어린 고양이의 항문을 핥아주는데 이는 배변을 유도하는 행동이고, 그렇게 훈련받은 고양이는 모래 같은 정해진 곳에서 배변하고 감추는 습성을 갖게 된다.> 고 쓰여 있었다.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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