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허물 벗다
'글. 최명임'

늦잠에서 일어난 아들이 눈곱만 떼고 출근했다. 몸만 홀랑 빠져나간 방에 옷가지가 널브러졌다. 뱀이 허물을 벗어놓고 스르륵 빠져나간 분위기다. 어렸을 때 뱀이 벗어놓은 허연 허물이 바위 옆이나 풀숲에 걸려있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갈급했을 속내를 지금에야 공감해 본다. 옷가지를 들고나오는데 아들 녀석이 허물 한 겹을 벗고 환하게 웃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미물인 뱀도 성장할 때마다 허물을 벗는다. 새로 생겨나오는 것에 밀려 원래 있던 허물은 각질화되는데 뱀뿐이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나아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운명을 타고났다. 뱀은 본능적으로 허물을 벗지 못하면 죽는 것을 알고 있어 나무나 바위에 몸을 문질러 탈피하려고 사투를 벌인다. 그때는 눈도 허연 막에 덮여 앞을 볼 수가 없는데 가장 난폭해지는 시기라고 한다.
한 뼘씩 성장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벗겨 낸 허물이라니, 미물의 삶도 녹록지만은 않겠다. 주로 봄부터 가을에 걸쳐 허물을 벗는다. 겨울잠은 박리를 위한 충전의 시간일 터, 엄청나게 소모되는 에너지를 감당하기에 그조차도 부족해 사경을 헤맨다.
아들에겐 어미 몸이 벗어야 할 허물이었다. 자궁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두려워 나오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 울음은 태를 벗고 더 큰 우주로 입성하는 벅찬 감동의 소리였는지 모른다. 아빠가 침대를 함께 쓸 수 없다고 말했을 때 한동안 혼자 잠드는 것을 무서워했다. 녀석의 사춘기도 허물을 벗어야 하는 봄이었다.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라 지켜보는 것이 상책임을 알면서도 신경이 곤두섰다. 두 딸은 무리 없이 지났는데,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어찌 수월했을까. IMF 후유증으로 막막 지경일 때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으니 전쟁을 치러내느라 된 몸살을 앓았을 거다.



아들 녀석이 겉멋이 잔뜩 들었다. 마음이 붕 떠서 허공을 돌아다닐 때는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 저도 나도 지뢰를 밟고 있었다. 누나들이 차분히 미래를 준비하는 동안 녀석은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아들은 방법을 몰랐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누나의 도움을 받으며 애를 쓰더니 대학까지 무사히 들어갔다. 일 년이 지난 뒤에 자퇴하겠노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인생에 4년은 무리수라고, 취업난을 뚫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선택이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들이 허물 한 겹을 벗고 있었다. 다시 원하는 학과를 선택해서 갔지만, 고학력 백수가 부지기수란 뉴스가 연일 나왔다. 군대 다녀온 후에도 취업난의 실체를 보게 된 아들이 복학을 고민했다. 막연한 불안감이 아들을 옥죄고 있었다. 한동안 갖추지 못한 이력서를 들고 나서더니 번번이 좌절을 맛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철학관을 찾아갔다. 남자는 나이가 지긋했는데 자식을 키우는 처지는 모두 같다며 조곤조곤 상담해주었다. 그의 말대로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겠느냐고 아들을 설득했다. 그날 저녁 녀석이 제 누나를 붙들고 황소울음을 울었단다. 마음 비빌 나무둥치를 찾고 있었던가 보다. 밤새 잠을 설친 아들이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시험에 자꾸 떨어지면 학교에 미련이 남는다고, 오갈 때 없는 저를 만들어 놓고 무명(無名) 추리닝 두 벌을 사 왔다. 백수의 상징인 츄리닝을 입고 나서는 아들에게 2년이란 시한부 시간을 주었다. 더는 뒷바라지할 여력이 없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공무원 시험이 백 대 일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녀석이 새벽 별을 보고 나가더니 오밤중 별을 보며 돌아왔다. 야생마 같은 녀석의 엉덩이에 뾰루지가 나고 여드름이 툭툭 불거졌다. 허물을 벗기 위한 몸부림에 생채기가 났지만, 안에서는 새살이 돋고 있었다. 도서관 의자가 닳았을 거라고 믿었는데 윤희를 만나 사랑도 했다. 둘은 허물을 벗겨 주기 안성맞춤인 바위였을까. 윤희는 교사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교육행정직으로 먼저 합격했다. 아들도 나와 약속을 정확하게 지켜주었다. 허물을 벗은 병아리 부부가 병아리 같은 새끼 둘을 나눠 안고 들어서면 공연히 눈물겹다.



뱀이 허물을 벗기 전에는 자기가 최고인 양 야생의 숲을 누비고 다닌다. 어느 날 몸이 근질근질하고 마음이 뒤숭숭해지며 새로운 무엇이 불쑥 돋아나올 때 놀라 어쩔 줄 몰랐을 거다. 해법을 찾아 사투를 벌이며 허물을 벗었을 때 그 충만한 기쁨을 알 것 같다. 아들의 사춘기도 질기게 저를 옭아매었지만, 한 겹 벗겨야 할 허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아들이 새롭게 부딪혀오는 어떤 힘을 감당 못 해서 버거워할 때마다 가슴 조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미의 기도와 기다림에 답하듯 그때마다 허물을 용케 벗었다.
아들은 밤낮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다. 허물을 벗지 못해 사경을 헤매는 그들과 마주하고 있으면 형사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기도 한단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있으면 가슴 울컥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때 흔들리는 시간은 허물을 벗기 위한 과정이라고, 아파도 잘 견뎌내라고 위로하는 아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때 못한 공부를 겸하느라 늘 분주하다. 아들에겐 이미 박리를 거부할 수 없는 허물 한 겹이 또 스멀스멀 각질화되고 있다. 수월할 리 없겠지만, 아들을 알기에 등 한번 쓰다듬고 말없이 응원하고 있다.
허물 한 겹 벗을 때마다 생으로 앓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가끔은 내가 살아 있음에, 내 곁의 모든 이가 살아 있음에 가슴 뭉클할 때가 있다. 이 몸뚱어리도 언젠가는 훌훌 벗어야 할 허물임에 그날까지 우리는 몇 겹이나 더 벗어야 할까.
사방 천지에 허물 벗는 소리 요란하다.
어느새 8년이 흘렀다. 합격자 발표 전날 밤 꿈이 생생하다. 방 가장자리를 빙 둘러 누런 호박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그렇게 큰 호박은 꿈이라서 가능했다. 쏟아져 들오는 빛으로 방안에 광채가 가득했다. 그날 아들이 허물 한 겹을 벗어놓고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EDITOR AE류정미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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