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심원정(心遠亭)에서
'글. 이정연'

언니 따라 칠곡 경대병원에 왔다가 결과 보는 시간이 많이 남아 송림사에 들렀다. 한여름 매미 소리는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계곡 옆 나무 그늘엔 산들바람이 불었다. 송림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불사를 했는지 종루도 새로 만들어 단청이 화려하고 입구의 설법전을 비롯 많은 건물들을 중수하고 불교대학 불교대학원까지 운영하느라 예전의 조용하고 소박한 모습은 많이 잃어버렸다. 카페까지 생겨 스님은 방안에서 조용히 음미하던 녹차 맛 대신 나무 그늘 벤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사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업적인 기업 같은 느낌이 들어 송림사 오층전탑 사진 한 장만 찍고 얼른 나왔다.
나오면서 보니 계곡 쪽 주차장 옆 대숲이 있고 전에 못 보던 대나무 사립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정자가 있다. 조용히 계곡을 내려다보는 아담한 정자에 누마루가 있다. 어쩐지 마음이 끌려 막아 놓은 울타리 사이를 비집고 계곡으로 내려가 보았다. 위에서 보는 것보다 정자는 더 아름다웠다. 널따란 바위에 지어진 정자는 심원정이라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아래 옆으로 군자소라는 작은 연당이 있는데 멋을 내느라 그랬는지 한두 발짝 되는 작은 다리 두 개를 놓고 이름을 천광교(天光橋) 운영교((雲影橋)라 했다. 나는 여기서 강렬한 문학과 풍류의 향기를 맡았다. 이 작은 연당에 일부러 다리를 만들고 그 이름도 거창하게 하늘의 빛이요 구름 그림자 다리라니…….



‘여긴 보통 정자가 아닌 것 같은데……. ’ 가벼운 흥분이 인다. 널따란 바위에는 귀암(龜巖) 이라 적혀 있고 그 위 고인돌처럼 생긴 돌에는 성석(醒石)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醒石? 깨어나는 돌? 내 의식을 깨운다는 뜻일까?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여기저기 보이는 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계곡 저편에는 최근까지 화살을 쏜 흔적이 보이는 과녁이 있다. 선조가 무신 집안의 정자인가 보다. 모기에 온몸을 뜯기며 사진 몇 장을 더 찍고 주차장으로 올라오니 아까는 눈에 띄지 않았던 플래카드가 하나가 나무에 매어져 있다. 나는 내 무신경한 주의력을 탓하며 읽어보았는데 ‘심원정은 영남지방 유일한 원림(園林)이며 별서정원(別墅庭園)이고 -중략- 경상도의 소쇄원이라 불리고 있다.’ 설명이다.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장독대도 있고 여느 정자와는 달리 강렬하게 이끌리는 뭔가가 있었구나 싶어 마음 같아서는 언니를 병원에 내버려 두고 한 시라도 빨리 집으로 오고 싶었다.
최근 나는 사진인 강충세 선생님께 한국의 별서라는 라는 책 한권을 선물 받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한국의 별서에 관한 책인데 별서의 사계절 사진과 함께 주변 외경 산세까지 진경산수화 기법으로 그려 시각적으로 부족함 없이 독자의 이해를 도왔고 여기에 별서를 전공한 교수의 설명까지 자세히 되어 있는 책으로 한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던 터라 심원정에 대한 호기심이 폭발 얼른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았다.
정자와 별서가 다른 점은 정자는 풍광 좋은 곳에 누각을 지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고 별서는 정자의 기능에 숙식까지 가능한 누정이라고 보면 된다. 별서가 요즘 별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별장보다 소박하고 문학과 풍류가 더해진 느낌이라고 할까.
심원정은 81년 전 기헌(寄軒) 조병선(曺秉善, 1873~1956) 선생이 회갑도 훨씬 넘긴 나이에 낙향해서 아들을 시켜 이 별서를 지었는데 주변 바위나 정원 연못에 각기 이름을 짓고 그 연유를 설명한 *심원정수석기(心遠亭水石記) 남겼다고 한다. 또 그 바위나 다리 연당마다 심원정 25경이라 정하고 시를 읊어 즐겼다고 하니 문단 언저리에 발 들여 논 나는 더욱 각별한 느낌이다. 한때 소쇄원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몇 번이나 찾아가 보고 느낌도 남겼는데 내 고장에 이런 별서가 있어도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원래 있던 자연경관을 헤치지 않고 작은 별서를 짓고 방마다 목적에 맞는 고운 이름을 지어 드나들 때마다 그 의미를 되새기고 의식을 깨어있게 하는 선인들의 지혜에 숙연해진다. 이런 아름다운 곳을 후손 기헌선생기념사업회 조오현 회장은 2015년 10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하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영남을 대표하는 원림인 심원정이 미래세대까지 온전히 보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화답했다고 하는데 내가 본 바로는 3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차츰 퇴락해 가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사립문은 잠겨 있고 대숲으로 내려오는 오솔길은 인적이 끊어져 잡초가 무성하다. 이런 아름다운 곳이 안내판도 없고 담을 넘어 도둑처럼 들어와야 하는 곳이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 사진 중 2016년 9월에는 바위의 글씨에 채색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 이후 보수한다고 누가 글씨에 채색했는데 빨간색으로 죄다 입혀 놓았다. 마치 북한의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섬뜩한 붉은색의 선동 구호 같아 원래 이끼가 끼었던 글씨의 고졸한 아름다움은 잃어버렸다. 이런 소중한 문화유산을 좀 제대로 전문가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 보수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가까이 있는 문화재를 널리 알리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야 말로 그윽하게 살면서 제 뜻을 다하는 심원(心遠)이 아닐까.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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