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옛정
'글. 박순철'

2021년 신축년도 며칠 남지 않은 세밑, 옛날 같으면 길거리나 상점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성탄을 축하하는 노래가 흘러넘쳤을 것이지만 조용하기만 하다. 선물 보따리를 가득 들고 감사의 인사를 다니는 아름다운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모두 지나간 흑백 영화 속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
평택 제천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 네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가 재미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곤 여성들이다.
“김 부장! 얼굴이 무척 좋아졌어요.?”
“아이고, 과장님! 이제 그 부장 소리 좀 거둬주세요. 듣기 민망해요.”
핸들을 잡은 남자 서 전 과장은 품질검사과 책임자로 아래 직원들을 알뜰히 챙겨주고 친동기간처럼 위해주는 자상한 상사였다.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직원들의 실력과 팀워크를 테스트하는 경진대회를 열었다. 서 과장이 이끄는 부서는 밤잠을 설치며 준비한 끝에 최우수 부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부상으로 1백만 원의 특별 상금과 2박 3일 제주도 휴가를 받고 환호성을 지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나간 세월이 아쉽기만 하다. 그 왕년의 팀이 다시 모였다.
“상무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하셔서 연세 드신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어요.” 막내 장 전 대리가 최 전 상무의 근황을 전한다.
“가만있자, 상무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더라?”
“나보다 10살 많으시니까 일흔다섯 되시는 것 같은데요” 앞 좌석에 앉아있던 유 전 부장이 얼른 말을 받는다.
“아직 20년은 끄떡없으실 거예요?”
“그러실 겁니다. 원체 강단이 있는 분이시니까.”
“과장님 운전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운전이라도 시켜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하하하”
사실 오늘 운전은 막내인 장 전 대리가 하겠다고 했으나 서 전 과장이 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리되었다. 서울에서 단양까지 200여km.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운전을 연약한 여자에게 맡길 사람이 아니다.



“책임은 나에게, 공은 직원에게”란 강령을 자신의 책상 유리판 밑에 숨겨 놓고, 무엇이든 잘못되는 일은 자신이 했다고 방패막이로 나서던 서 과장! 만년 과장이란 이름표를 퇴직할 때까지 달고 다니던 서 과장! 후배들이 차장, 부장으로 승진하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며 업무에만 전념하던 서 과장!
그에게도 승진의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퇴직 1년을 앞두고 차장 물망에 올랐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사양했던 서 과장이었다. 그 수혜자가 지금 차에 함께 타고 있는 유 전 부장이다. 유영미 씨는 당시 타부서 과장으로 같은 직급이었지만 근무 평점에서 밀리고 있었다. 서 과장이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차장으로 승진하고, 퇴직 무렵에는 부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유 부장보다 1년 후배인 김보미 씨도 차장을 거쳐 부장까지 승진했다. 다만 막내 장희숙 씨는 승진보다는 자녀교육과 살림에 더 신경 썼다. 아들 둘은 S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지금 모(某)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누가 더 성공하고 덜 성공했는지를 따질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오늘 찾아가는, 단양 외진 산골에 사는 최영아 전 상무는 한 점 구김살 없는 여걸이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엄마 같은 인품으로 직원들을 이끌었다. ‘직원들의 아픔은 내 아픔, 직원들의 경사가 내 기쁨’이라는 신조로 살아온 사람이다. 당시 여자들은 승진에서도 밀리고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부당함을 못 보는 최 상무, 하늘 같은 회장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여걸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옛 상사에게 연말을 맞아 인사하러 찾아가고 있는 게 전혀 이상할 리 없다.
“희숙 씨! 상무님 드릴 선물 뭐로 준비했어?”
“안개꽃만 한 다발 샀어요. 다른 것 사 가지고 가면 뭐라고 하셔서……”
“잘했어요.” 뒤를 흘금 돌아보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 서 전 과장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흐른다.
“그러면 오늘 회비 한 5만 원씩 내면 될까?”유 전 부장의 제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전에도 우리가 가면 꼭 점심을 해주셨잖아요. 그래서 단양 시내에 있는 음식점을 예약한다고 했더니 벌써 새로 생긴 근사한 집 예약해 두었다고 하시네요. 당연히 식대도 우리가 내야죠?”



단양에 내려온 지도 10년이 넘은 최 전 상무! 아들딸 출가 시키고 나서 두 부부가 호젓하게 텃밭에 푸성귀 심어 뜯어먹고 꽃이나 가꾸고 살자며 시골에 내려왔다. 옛정이 그리워 찾아오는 동료들에게 꼭 자신이 지은 밥을 먹여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옛 상사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는 게 불편해서 모시고 나가서 사드린다고 하면 찾아온 손님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무에 어렵냐며 손사래를 치는 분이었다.
최 전 상무는 여전히 꼿꼿했다. 헐렁한 바지에 패딩점퍼를 입고 있는 모습은 옆집 할머니처럼 격의가 없어 보였고 피부도 좋아 보였다. 특히 안개꽃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은 꼭 아이들 같았다.
“상무님! 표정이 밝으시고 활력도 넘쳐 보이십니다.”
“네. 산골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봐요.”
“저도 퇴직하고 바로 이런 시골로 내려왔으면 좋았을 걸 괜히 서울에 죽치고 있네요.”
“아서요. 지금은 시골 공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그리고 서 과장님은 늦었어요. ”
최 전 상무가 내온 차에서는 국화 향기가 진동했다. 은은한 향이 응접실 가득 퍼졌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많았어요. 식탁으로 가십시다. 시장하실 것 같아 내 준비 해두었어요.”
“아니, 상무님! 오늘 식당에서 드시겠다고 하셨잖아요?.”
“호호호 장 대리! 이곳에서 식당 있는 곳까지 나가려면 시간이 꽤 걸려, 그 시간에 여러분과 더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그랬어요.”
“하여간 상무님은 아무도 못 말려. 그래요. 우리 상무님 솜씨 녹슬지 않았나 한번 보자고요?”
“내가 김 부장 음식 솜씨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정성껏 차렸으니 어서 식탁으로…….”
식탁에는 묵나물 무침을 비롯해 더덕구이와 연잎에 곱게 싼 오곡으로 지은 연밥이 차려져 있었다.
“와! 상무님! 이렇게 잘 해주시면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와야 하겠어요.”
“좋아요. 그러면 내년에는 산나물이랑 도라지 더덕 더 많이 뜯고 캐서 준비해 둘게요. 그러면 솜씨 좋은 유 부장이 좀 무쳐요.”
“네, 상무님!”
“그런데 상무님! 이제 상무님 말씀 믿지 말아야겠어요.”
“왜?”
“식당 예약해 놓으셨다고 하셔서 철석같이 믿었더니 거~~~”
“호호호 미안해요.”
“아닙니다. 상무님! 잘 먹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건강한 모습이 내년에도 변함없기를 기원합니다.”
“상무님도 코로나19 걸리지 말고 항상 건강하세요.”
옛 상사의 덕담에 둘러앉은 옛 동료들은 웃음꽃을 가득 피워 올린다.

EDITOR AE류정미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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