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골목길을 읽는다
'글. 박종희'

어느새 해가 많이 길어졌다. 퇴근 시간이면 깜깜하던 하늘이 7시가 다 되었는데도 환하다. 옆 단지 아파트의 장터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3월이지만 아직 쌀쌀한 데 성미 급한 목련은 벌써 봉오리가 맺혔다. 매화나무에 맺힌 꽃봉오리도 옹골져 금방 터질 듯 탱탱하다. 늘 차를 타고 다녀 주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피지 못했는데 바람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미 봄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슈퍼를 지나 좁은 길로 들어서니 인기척에 놀란 골목이 어깨를 곧추세운다.
골목길을 따라 걷는데 재미있게 그려놓은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언뜻 봐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붓질한 그림이다. 색색의 물감을 풀어 아이들의 세계에 걸맞은 꽃밭도 만들고 나무도 심어놓았다. 반대편 담벼락에는 한국을 빛낸 사람을 주제로 한 인물화도 걸려있다.
누군지 참, 좋은 생각을 해냈다. 아파트와 아파트가 서로 등지고 있어 자칫하면 지저분해 보일 수 있는 골목길을 '테마가 있는 길'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골목 끝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노점이 있었다. 어둠 살 번지는 난전에는 저녁 찬거리를 사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물 좋은 생선이 있다고 외치는 아저씨와 냉이, 달래 등 푸성귀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 맛깔스러운 밑반찬을 내놓은 중년 여자가 구수한 입담을 펼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장이 열리는 이곳에 오면 싱싱한 부식 거리를 사는 것도 좋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그냥 지나치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할머니한테 냉이와 달래를 샀다.



거스름돈을 챙겨주시던 할머니가 어느새 냉이 한 움큼을 집어 봉지에 더 담는다. 식구가 적어 괜찮다고 해도 손사래를 치시는 할머니의 인정스러운 손이 넘쳐 나오는 냉이 봉지를 묶는다. 그사이 조금 남아있던 해가 슬그머니 동네를 빠져나가고 어둠이 사방을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노점을 벗어나 어둑어둑해지는 골목을 돌아서니 놀이터엔 아직도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한창이다. 몇몇 꼬마들은 엄마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미끄럼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집에 가야 한다고 화를 내는 엄마 앞에서 더 놀다 가겠다고 떼를 쓰며 우는 아이를 보니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에 골목길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래서인지 골목길은 늘 왁자했다. 해가 지고 깜깜해질 때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골목에서 놀다 보면 아이들을 부르던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동네에 싸움 잘하는 골목대장이 있었다. 키가 아주 작고 대추 알처럼 단단한 아이였는데 그 친구는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할 때마다 나타나 고무줄을 끊어 달아났다. 그 친구를 피해 다른 골목에서 놀아도 용케 찾아와 고무줄을 휘감고 도망쳤다. 공기놀이나 목자 치기 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둠 공기놀이를 하느라 모아놓은 공깃돌을 발길질로 쓸어버리거나, 깨금발을 떼고 목자 치기 하는 친구를 떠밀어 넘어뜨리는 일도 있었다. 더 재미있었던 친구는 골목대장 명수를 따라다니던 철이다. 철이는 고무줄 끊을 용기도 없으면서 괜스레 명수를 따라다니다가 힘센 여자아이한테 잡혀 혼이 났다.
동네 친구 중에 남자보다 더 힘이 세고 덩치 큰 여자아이가 있었다. 학년은 같지만, 우리보다 두 살이 많은 그 친구한테 잡히면 남학생도 흠씬 얻어맞았다. 명수가 잘못했는데 두들겨 맞는 일은 언제나 철이 담당이었다. 철이는 늘 명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두 번째 대장 노릇을 했다.
만날 여자아이들을 괴롭히고 바지는 줄줄 내려가 엉덩이가 보일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하고 다니던 명수가 중학생이 되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학교에 가다가 골목길에서 마주치면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 용감하고 날래던 골목대장 명수는 어디로 가고 점잖고 단정한 남학생이 서 있었다. 생각해보니 명수는 그때가 사춘기였던 것 같다.



골목은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던 곳이다. 뉘 집 딸이 얌전하고 뉘 집 남자가 바람이 났다는 둥, 골목은 동네 사람들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햇살이 기지개를 켜고 나오는 시간이면 골목에 모여앉아 이웃집 이야기를 깨알같이 전하던 아낙들의 모습도 옛일이 되었다. 자다가 오줌 싸서 자기 키보다 더 큰 키(箕)를 머리에 쓰고 소금을 얻으러 가던 사내아이의 얼굴도 추억 속으로 묻혔다.
입학 철이면 담장 위에 얹어 놓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합격자 발표를 듣던 곳. 몇 가구 안 되는 동네에 소문은 골목에서 피어났던 것처럼 젊은 연인들의 연정이 시작되던 곳도 골목길이다.
언제인가부터 골목길에 사람의 발길이 뜸해졌다. 사람들의 입에 정겹게 오르내리던 골목은 어둡고 음산함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골목이 주는 친근함과 푸근함도 잊힌 지 오래다. 삶에 애환과 낭만이 있던 골목길은 이제 추억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골목길도 이젠 늙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남몰래 사랑을 키우던 청춘들도 하나둘 골목을 떠났다. 왁자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가뭇없다.
오랜만에 골목길에 서니 유년 시절의 필름을 판독하듯 세세하게 들려주는 골목의 이야기에 가슴이 짠해진다. 벌써 4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공기놀이를 잘하던 숙이와 짓궂은 남자애들을 혼내주던 덕희는 어떻게 변했을까.
밤늦도록 뛰놀며 골목길의 기척을 읽던 친구들과 아이들을 부르며 목소리를 높이던 어머니들의 야윈 얼굴도 어른거린다. 긴 겨울밤에 '메밀묵, 찹쌀떡'하고 소리쳐 부르던 정겨운 목소리가 있던 그 시절의 골목길이 아주 그립다.

EDITOR AE류정미
박종희 작가
이메일 : essay0228@hanmail.net
2000년 『월간문학세계』수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전국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김포문학상
201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제1회 119 문화상 소설 최우수상 수상 외 다수
2008년 ~ 2019년까지 중부매일, 충북일보, 충청매일에 수필 연재
저서: 수필집 『가리개』『출가』
한국작가회의, 한국산문작가협회, 충북작가회의 회원
청주시, 세종시 수필창작 강사.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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