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시루
'글. 이정연'

성묫길에 들른 고향집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퇴락해 가고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는 집 둘레를 돌다보니 보이는 풍경마다 다 눈물겨웠다. 무너져 내린 흙에 반쯤 덮인 샘물은 지치지도 않고 새어나와 고추밭이 된 마당을 온통 적시고도 골목으로 넘쳐흐른다. 마치 잃어버린 주인이라도 찾아 나서려는 듯.......우물 옆에 어머니가 쓰시던 떡시루가 엎어져 있다. 금이 가서 철사로 이리저리 얽어매어 꼭 생전의 어머니처럼 늙은 시루는 마른 환삼덩굴줄기 아래 삐죽이 엉덩이를 내밀고 주인 잃은 슬픔을 탄식하듯 버려져 있는 것이다. 여름에 왔으면 풀숲에 덮인 이 시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두 말 반짜리 이 떡시루는 한 때 어머니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던 물건이었다.
음력 시월이면 외지에서 오신 친척 어른들의 두루마기 자락이 산천에 온통 하얗게 나부꼈다. 초이렛날 가장 먼저 드는 앞산의 묘사(墓祀)를 시작으로 스무 하룻날까지 오늘은 이 골짜기에서 내일은 저 골짜기에서 '유세차 모년 모월…….' 축문을 읽는 당숙부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다니러 오신 어른들이 삼 주간이나 우리 집에 머물며 시월 한 달을 고스란히 보냈다.



평소에는 어머니를 곰살궂게 대하지 않으시던 아버지도 묘사 때만은 달랐다. 어머니는 체신은 작으셔도 손끝은 매우셨다. 묘사 준비는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어야 했는데 어머니의 솜씨는 한 번도 까다로운 집안 어른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없었다. 자연 아버지도 이때만은 으쓱해지시는 모양이었다.
노란 콩고물과 찹쌀가루를 켜켜이 넣고 찌면 될 것처럼 쉬워 보이는 시루떡도 실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었다. 우선 켜로 올리는 떡이 보기도 가지런해야하고 알맞게 촉촉해서 먹기에도 좋아야 했다. 어머니의 시루떡 솜씨는 남달랐다. 그 큰 시루에 켜켜이 놓는 떡이 좀 두껍거나 얇거나 할 텐데 어머니의 솜씨는 늘 자로 잰 듯 골랐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당숙부님은 '형수님의 손끝에는 눈이 달렸다' 는 말로 대신하셨다. 노란 박 바가지에 일정하게 계량해서 솔솔 뿌린 쌀가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두께가 균일하고 큰 가마솥에 얹은 시루와 솥의 경계에 밀가루 반죽한 시루번을 꼼꼼히 붙여 새끼줄로 묶어 정성을 다한 어머니의 떡 맛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루떡 찌는 날은 먹지 않아도 포만감에 행복했다. 아궁이의 장작불은 활활 타오르고 나는 볼을 발갛게 달군 채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외할머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간간이 어머니의 얼굴에 장작불빛처럼 환한 웃음이 일어났다 스러지곤 하였다. 이윽고 구수한 떡 냄새가 노란 초가의 처마아래 가득 차면 아련한 친정 이야기도 끝이 나고 이제부터 어머니의 주의가 요구되는 시간인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미나리꽝에 가서 미나리 파란 잎을 줄기 째 따오라고 하셨다. 통통하게 살이 찐 미나리 잎을 여럿 따 왔다. 콩기름을 두른 번철 커다란 찹쌀 전병 위에 곱게 씻은 미나리줄기를 놓고 미리 물에 불려 꽃잎 모양으로 오려둔 대추 과피(果皮)를 올려놓으면 그대로 활짝 모란꽃이 피고 앙증맞게 맺은 봉오리도 되었다. 아궁이 불을 더욱 줄이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대추피로 꽃문양을 붙여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예술혼에 빛나는 화가였다. 봉긋하게 부푼 대추꽃잎과 기름에 지져지면서 더욱 파래진 미나리 잎이 새하얀 도화지 찹쌀 전병 위에 곱게 피어났다. 나는 감탄하며 어머니가 놋 주걱으로 스르르 밀어 주는 예술품, 한 무더기 흐드러지게 핀 모란이 그려진 찹쌀 부꾸미를 싸리광주리에 소중하게 받았다.



가로세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한 시루떡을 마치 주춧돌처럼 든든하게 함지박에 수북이 담고 그 위에는 파란고물과 흰 고물을 묻힌 인절미를 올리고 그 위에는 국화문양의 떡살로 지그시 누른 흰 절편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맨 위를 식혀 둔 찹쌀 전병으로 덮으면 완성이었다. 고운 면보에 함지박을 싸는 어머니의 이마가 엄숙하고 경건해 보였다. 그 소중한 보따리를 지게에 지고 어깨가 으슥해진 아버지가 뒤란으로 난 오솔길로 오르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어머니와 내가 나란히 서서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어깨가 좌우로 출렁이며 한껏 힘이 들어가 있다. 보나마나 아버지는 곧 이어질 찬사를 생각하고 한껏 설레어 등에 진 짐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셨으리라. 아버지의 어깨가 조릿대 숲으로 우쭐우쭐 완전히 사라지실 때까지 흐뭇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한 모습으로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그제야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돌아서셨다. 어머니의 할 일을 다 하신 것이다.
한 때는 고단함을 나누며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비례해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이며 당신과 함께 했을 시루, 다시 올 수 없는 어머니처럼 이 시루의 생명도 이제 끝이 났다. 어머니가 흙으로 돌아가신 것처럼 이 시루도 곧 흙이 될 것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유일하게 내게 풍요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시루, 당초 떡 찌는 일 말고는 아무 용도가 없는 물건이 그 용도조차 방앗간에 빼앗긴 채 쓸쓸한 빈집의 뒤란 우물곁에 버려져 있다. 이제는 여기 저기 금이 가고 깨져 만지면 금방이라도 표면이 부슬부슬 떨어져 내릴 것 같다. 어머니의 고단한 일상과 찬사와 고뇌와 아픔이 시루 밑바닥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모두 빠져나가고 이제는 혼자 쓸쓸히 늦은 오후의 겨울 햇살을 받으며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젊고 고운 시절을 자식과 가족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의 거룩한 생애가 이렇게 버려져 있는 것이다. 고향 산자락 황토에 묻혀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처럼 이 사금파리 조각을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을 것이다.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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