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이드

옹기종기 옥산 마을길 따라
아름답고 치열했던 백년의 이야기
'덕촌리 / 검은 정순만 / 덕신학교'

그는 보지 못했다. 조국의 하늘에 밝아오는 새벽을, 고향집 마당에 쏟아지는 새날의 햇살을. 그의 삶은 격정과 분노로 얼룩졌으나 비극의 한 생을 바쳤던 그의 꿈은 이토록 환한 고향 햇살 아래 깃발처럼 나부끼는 평화였다.
그 하늘에 뜨거움이 흐른다. 아름답고 치열했던 100년의 이야기를 잊지 말라고.
해마다 독립만세 울려 펴지는 마을 _ 덕촌리
덕촌리 사람들은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동정씨 문중의 세거지로 문절공 정수충, 임진왜란 때 순절한 정검 등의 인물을 배출했고, 격변의 시기였던 일제강점기에도 치열했던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언제나 그 다음이 아니던가. 덕촌리가 특별한 건 과거의 의로움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 때문이다.
덕촌마을 풍경

삼일절 이야기부터 해보자. 해마다 삼일절 아침이면 덕촌리사람들은 마을 뒷산인 응봉산에 오른다. 해발 150m의 응봉산은 정상부가 널찍해 2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미호천 쪽들판을 내려다보며 함께 설 수 있다. 그곳에서 마을사람들은 다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친다. 1919년 3·1운동 당시 덕촌리의 학생이었던 정해원이 앞장서고 마을사람들이 따라 외쳤던 그날의 함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세행렬이 산을 내려오면 이번엔 신협이 있는 마을앞마당이 떠들썩해진다. 산에 오르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4백 명이 넘는 인파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삼일절을 기린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고, 풍물의 난장을 펼친다. 1909년 설립돼 100년 전의 만세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덕촌교회의 성가대는 이날만큼은 찬송가가 아닌 독립군노래를 부른다.
가려진 거인, 비운의 독립운동가 _ 검은 정순만
한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희망을 위한 싸움 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 뜨거운 격정으로 칼바람 부는 시대와 맞섰던 사람. 하지만 끝내 독립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서른아홉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 덕촌리가 낳은 비운의 독립운동가 검은 정순만鄭淳萬(873~1911/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추서)의 이야기다.
그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가려져 있었다. 그래서 ‘정순만’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남긴 발자취는 결코 적지 않다. 정순만은 박용만, 이승만과더불어 ‘3만’이라 불리며 초기 독립운동 시기에 일찌감치 이름을 드러냈다. 독립협회 참여를 시작으로 상동청년회에서 청년들의 독립활동을 주도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반대, 을사늑약 반대 투쟁, 을사오적 암살기도까지 정순만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정순만 생가

1906년 북간도 망명 이후엔 이상설과 함께 항일민족교육의 효시가된 서전서숙을 세웠고, 절친한 동지인 이상설과 이준의 헤이그 특사 임무를 돕기 위해 경비를 모금하기도 했다.
또한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발행에 참여하고 주필을 맡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과 정순만의 관계이다.
두사람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이 결성한 동의회 의 핵심인물. 일제의 비밀자료는 안중근 의거와 연관된 주요인물로 정순만을 주목했다. 당시 중국의 『신주일보』는 ‘안중근과 정순만은 생사를 같이 하는 동지’라고 보도했고, 실제로 정순만은 안중근 의거후 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구명활동에발 벗고 나섰다.
그렇다면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이 거인은 왜 오래도록 가려져 있었을까. 여기엔 시대의 비극을 넘지 못한 개인의 비극이 있다. 당시연해주 한인사회는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정순만의 권총 오발사고가 벌어졌다. 결국 그는, 파벌이 다른 동지를 죽였다는 참혹한 오해 속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고향과도 소식이 끊겼고 무덤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의 모습을 짐작할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정순만은 별을 닮은 독립 운동가였다. 암흑의 하늘에서도 확고하게 자신의 궤도를 그리며 빛나다가 한순간의 일탈로 유성처럼 사라진 비운의 거인. 2015년 그의 고향에서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 것은 그 별빛을 잊지 않기 위함이리라.
마을을 깨운 근대학교의 복원 _ 덕신학교
희망은 나무라기보다 씨앗 같은 것이 아닐까. 덕촌리가 낳은 독립운동가 정순만이 망명길에 오르기 전 고향에 뿌려놓은 희망의 씨앗이 있었으니, 1906년 세워진 덕신학교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와 정순만 등이 활동했던 상동청년회의 인물들은 을사늑약 반대 투쟁이 실패로 끝난 뒤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들은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신교육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김구는 황해도로, 정순만은 옥산의 덕촌마을로 향했다.
덕신학교 전경

덕촌리에는 하동정씨 문중의 마을글방 전통이 오래도록 내려오고 있었다. 정순만은 문중의 정재봉, 정두현 등과 의논해 옥산 지역 최초의 근대학교인 덕신학교를 열었다. 한문 위주의 서당 교육에서 벗어나 산술, 역사, 지리, 외국어 같은 근대교과를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키워주기 위한 학교였다. 이후 정순만은 망명길에 올랐지만 덕신학교는 하동정씨 문중의 지원 속에 한때 학생 수가 80명이 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덕신학교의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은 마을을 각성시켰고, 그 영향은 1919년 덕촌리 항일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돌아보면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이 결코 놓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덕신학교도 그렇게 치열하고 아름다운희망이었다. 그런 학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지 100년만에 복원 됐으니 꿈같은 일이 아닌가. 건물만 복원한 게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프로그램까지 운영 중이다. 이또한 덕촌마을 사람들이 새롭게 뿌리는 희망의 씨앗이리라.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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