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서슬 푸른 봄
'글. 최명임'

몸통을 안으면 아름이 넘을 거다. 질박한 목피일지언정 굵은 팔을 뻗쳐 가지를 받치고 있다. 어린잎들이 봄바람에 겨워 살랑거린다. 아비 품에 달려드는 응석받이처럼 안겨 응석이라도 부리나, 긴 팔이 이따금 이리저리 쏠린다. 아비가 가솔을 품어 안은 듯한 정겨운 모습이다.
나무는 억지스러워 보이거나 간섭을 받은 흔적이 없다. 적당히 양지바른 곳에 뿌리내리고 그늘을 일구어 지나는 이의 부러움을 탄다. 더러는 나무꾼의 낫 놀림 한 번쯤은 당했을 법한데.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에 맞추어 흔들리면서 언젠가 찾아올 태풍을 배웠던 게다. 눈보라와 장마, 태풍 매미와 사라도 잘 견디었다. 하늘과 숲과 바람과 그 아래 사람까지 아우른 조화가 깃발처럼 나부낀다.
우리 부부가 소일거리로 가꾸는 과수 밭에 갈 때마다 눈인사로 만나는 갈참나무다. 이 나무는 소신껏 살아선가 그냥 자연스럽다. 누가 와서 가지를 치거나 다듬는 일도 없이 마음껏 양껏 커나갔다. 태풍이야 잠시 지나갔을 터, 설령 그 태풍에 가지 하나 나가도 금방 새살이 돋았지 싶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은 도심에서 찌든 채 살아가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지 않은가.
도심 곳곳에는 나무들이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빼도 박도 못하는 삶을 둘러매고 묵묵히 먼 길을 가고 있다.



조치원을 지나 청주 초입에 들어서면 그 유명한 플라타너스 숲길이 나온다. 파수꾼처럼 줄지어 서서 청주로 오는 손님을 반기고 떠나는 손님을 배웅한다. 사람들은 가로수 숲길이 아름답다고 즐기지만, 풍경이야 제대로지만, 이들의 뒷모습은 아파서 더러는 고사하는 나무도 있다. 사람에게 혹사당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늘까지도 뻗어 나갈 수 있는 나무가 한 평 남짓 땅에서 단칸 셋방살이처럼 서럽다. 거침없이 뿌리를 내고 가지를 뻗었었다. 사람들은 방종이라 몰아세우고 톱날을 들이댔다. 가끔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신음인가, 하고 귀를 기울인다.
겨울이면 이 나목들은 창상에 얼룩진 몸뚱어리로 시위라도 할 듯이 줄지어 섰다. 나는 겨울부터 초봄 새순이 나오기 전까지 그들을 보는 것이 정말 달갑지가 않다. 공연히 내 몸 일부가 아파진다. 인부들이 톱날을 들이대고 멀건 생가지를 잘라내기에 이유를 알면서도 곁지기에게 왜 저러냐고 물었다. 우리의 편리와 즐거움을 위해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일말의 미안함은 느껴야 할 것 같다.
뭉뚝뭉뚝 가지가 잘려 나간 데가 옹이로 굳기까지 된 몸살을 앓는다. 사십 년 동안 그들을 지켜보는데 나는 가끔 한 나무를 붙들고 옹이를 세어본다. 몇 개의 옹이야 연륜으로 보이지만, 연년이 받은 상처로 생긴 옹이는 나병 환자의 뭉툭해진 열 손가락처럼 서늘하다. 우리가 무책임하게 방사하는 이기적 부산물과 문명의 찌꺼기 앞에서 코를 막고 컥컥거리는 신음도 함께 들린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뭉크의 절규를 떠올린다. 허파는 까맣게 그을려 호흡곤란에 시달리고, 염통은 제구실을 못 해 부정맥을 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모두 산으로 들로 돌려보냈으면 좋겠다. 들녘이나 숲으로 가면 숨통이 트일 텐데. 자연에 묻혀 인위는 사라지고 자연스러워질 거다. 우리의 이기로 굳이 가로수가 있어야 한다면 빈자리에는 마디 자라는 주목은 어떨까. 천년을 사는 나무라면 더디 자라면서도 강인하고 그 멋스러움이 고스란히 남을 텐데. 딱히 주목이 아니어도 다른 나무를 심을 수 있다. 플라타너스는 너무 성급하게 가지를 뻗어서 혹, 교만이 꺾여나간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옹이는 한 뼘 성숙할 때마다 받은 훈장이 아닌가.



신기하게도 봄이 오더니 뭉툭한 팔과 어깨너머로 희망이 퍼덕이고 있다. 겨우내 몸부림치던 생의 의지가 봄을 구실로 터져 나왔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다. 분연히 일어섰던 청년들의 서슬푸른 열정이다. 동학군의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들의 분노는 발광發光하는 오로라였다.
그들의 겨울이 서슬푸른 봄에 묻힌다. 나는 겨우내 몇 발짝만 나가면 숲길의 설경을 볼 수 있었다. 절망스러운 어깨 위로 내려앉은 은사시 같은 순백과 정결의 극치를 보았다. 희망을 예고하는 대서사시 같아서 황홀했다. 그들의 봄은 간섭과 수난을 무릅쓰고 눈물겹게 이룬 것이라 더 아름답다. 자유를 갈구하던 이들의 벅찬 소요는 우리의 지친 마음을 씻고도 남는다. 여름과 가을은 또 어떤가. 여름내 화기를 삭이며 숲 그늘을 이루고 드디어 맞은 가을은 한없이 뿌듯하다. 해마다 가을은 다시 올, 봄을 위해 겨울을 불러들이고 겨울은 숨죽이며 봄을 품고 눈바람에 맞섰던가 보다.
나는 숲속의 나무들이 우리처럼 얽혀서 살지언정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다. 뒤로는 숲이 있고 앞으로는 탁 트인 벌판이다. 싱그러운 바람과 햇살이 건강한 나무로 키워주지만, 숲의 무질서가 질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질서 안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굳이 산으로 들어가 혼자 살 이유가 없겠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자유를 즐긴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어나는 외로움이 보여서 안쓰럽다. 숲의 생기를 빌어 상처가 낫거들랑 우리와 어울려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사람 숲에서 어울렁더울렁 사는 것이 사람살이가 아닌가. 그리 살다 보면 우리 사이도 단단히 다져질 테니. 애를 삭이고 받은 훈장이 나무에만 있으랴.
자유의지로 존재하는 숲은 생명이다. 숲의 무질서는 엄연한 질서이다. 방종이 아닌 자유다. 사방 숲이 흐트러지고 있다. 나무가 쓰러진다.
나는 숲에서 사람을 보았다. 사람에게서 숲을 보았다.
매일 밤 꿈을 꾼다. 나도, 당신도, 도심의 숲도…. 그 꿈은 탈속이 아니라 인내에 대한 소망이다. 광활한 숲과 무질서의 유희를 향한 동경보다 문드러진 상처에 새살이 돋고 꽃을 피울 때까지 지금 이곳에서 살아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연하는 자유가 초록 횃불로 타오른다. 함께이되 고독한 우주의 미아들이 온통 궐기한 서슬 푸른 봄이다.

EDITOR AE류정미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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