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감꽃질 때
'글. 이정연'

지금쯤일 거예요.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시골집에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어요.
깨끗이 비질된 마당, 감나무 아래에 멍석을 깔아놓고 학교에 다녀오면, 감꽃이 빽빽이 그 멍석 위에 떨어져 있어요. 볏짚의 심을 빼내 위를 돌려 묶어 매듭을 지우고 그 감꽃을 주워 하나하나 끼우면 긴 꽃타래가 되어요. 그걸 가지고 놀다가 목걸이처럼 걸어보기도 하고 또 배가 고파지면 하나씩 따먹기도 했어요. 멍석 위에 소반을 가져다 놓고 숙제를 하다보면 감꽃이 톡 머리에 떨어져 대롱대롱 머리카락에 달리고 더듬더듬 떼어보면 아기피부 같은 뽀얀 감꽃이 그렇게 예뻤어요. 떫은맛을 참고 자꾸 씹고 있으면 입안이 달콤해지는 감꽃은, 처음엔 투박하지만 정이 깊은 시골친구 같은 맛이에요. 또 하나 또 하나 하다가 속이 아려올 때쯤이면 어느새 감나무 그림자는 지붕을 훌쩍 넘어가고 들에 가신 부모님이 돌아오셨어요. 까만 무명치마가 뽀얗도록 밭일을 하신 어머니가 항상 쟁기를 진 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하세요. 그래도 전 늘 어머니가 사립문에 들어서시기 훨씬 전에 알아요. 소의 요령소리가 먼저 도착하니까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봐요.
요샌 왜 자꾸 그런 어린 시절이 눈물 나게 그리운지 모르겠어요.
그대가 하루쯤 시간이 난다면 그 시골집에 함께 가고 싶어요. 차는 중간 어디메쯤 세워두고 한적한 시골길을 그냥 그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서 가고 싶어요. 너무나 조용한 산골이어서 우리의 기척에 길섶에서 갑자기 꿩이 울며 날아올라도 놀라지 마셔요. 지금쯤 흔한 풍경이에요. 첩첩산중 천수답엔 물이 갇히고 어쩌면 쟁기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직 그곳엔 경운기가 없거든요. 경운기로 농사지을 만큼 넓은 들도 없거니와 모두 도회지로 떠나 버려서 초로의 노인 몇 분만 빈집인 듯 살고 계시거든요.
타박타박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길 옆 아무 데나 앉아서 흐르는 구름을 보고 계셔요.
그렇게 조금만 기다리면 곧 뱀딸기를 따올게요. 길가 풀숲을 조금만 뒤져보면 뱀딸기 몇 알쯤 금방 발견할 거예요. 연녹색 칡 잎새에 곱게 싸드리는 뱀딸기를 너무 예뻐서 먹지 못한다고 사양치는 마세요. 전 그저 그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더 보기 좋을 테니까요.
감꽃이 많이 떨어져 있으면 우리 누가 더 많이 주워서 길게 타래를 만드나 업어주기 내기해요. 그대가 무겁지 않다면 좋겠어요. 분명 제가 이길 테지만 그래도 혹 모르잖아요.
제게 업히고 싶어서 안달한 그대는 더욱 필사적이실 지요. 하지만 매년 그렇게 감꽃을 주워 먹고 큰 저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주울지를 잘 알아요. 우선 겸손한 사람의 몸짓처럼 땅에 납작 낮아져서 동선을 절약해야 해요. 아이참 이런 건 미리 말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런 놀이는 그대가 이겨도 제가 이겨도 참 기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업히면 그대의 머리칼 냄새가 기분 좋을 거고, 그대가 업힌다면 손에 느껴지는 토실토실한 엉덩이의 감촉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돌아오는 길은 서둘러야 해요. 산엔 해가 지는가하면 어느새 산그늘이 내리고 또 금방 어둠이 찾아오거든요. 그래도 산이 하는 말을 모른척하면 안 돼요. 가만히 귀기울이면 소나무와 바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솨아 소나무의 함성 같기도 하고 바람의 노래 같기도 해요. 그 소리 속에 묻혀 청설모가 웬 낯선 손님인가 하고 호기심에 못 견뎌 냉큼 나무 위로 뛰어 올라 고개를 내밀 거예요. 그래도 그 녀석을 쫓지는 마세요. 이 나무 저 나뭇가지를 날아다니는 녀석은 재롱이 제법 귀여운 장난꾸러기거든요.



어쩌면 그대는 그대로 오기가 싫어서 하루쯤 묵어 가고 싶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사람에 지친 그대와 나는 어쩌면 몇 마디 위로의 말이나 혹은 몇 잔의 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닐 거예요. 그대의 상처가 뭔지, 무엇 때문에 지쳤는지 걱정처럼 묻는 천박한 호기심보다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그냥 함께 걸어주기만 하는, 자연처럼 무심함이 더 고마울 거예요. 진정 그렇다면 전 먼 친척 할머니께 안 쓰던 골방이라도 하나 주십사고 말씀드려 볼게요.
오늘 그대는 산길을 걷느라 좀 피곤하셨을 거예요. 우선 시냇가로 가서 편평한 바위에 앉아 발을 내미세요. 제가 천천히 씻어 드릴게요. 간지러워도 조금만 참고 그냥 계셔요. 그대의 못생긴 새끼발가락은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그대는 그저 손이 심심하면 물 한 줌을 쥐어 뿌리며 송사리 떼와 장난이나 하세요. 푹신한 수건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제가 입고 있는 치마를 뒤집어 쓰윽 닦으면 돼요. 시골에선 다 그렇게 한다니까요, 글쎄.
시골이라 변변한 찬은 별로 없을 거예요.
된장과 상추 그리고 물김치가 전부겠지요. 그대의 식성이 까다롭지 않다면 좋겠어요.
제가 설거지를 서둘러 마칠 동안 그대는 별이나 보고 계셔요. 밤하늘의 별이 그렇게 많은 줄 아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 거예요. 전에 누군가 그러셨어요. 시골에서 밤에 별을 보면 와글와글, 소란스럽다고요. 금방이라도 까르르 톡톡 쏟아질 것 같지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한 번도 그런 적은 없답니다. 유성이 길게 꼬리를 그리거든 재빨리 소원을 비세요. 저와 상관없는 소원이어도 제가 알리 없겠지만 그래도 저와 오랜 친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비셨으면 좋겠어요. 토라지고 멀어졌다가도 한 달이 지나면 변함없이 활짝 웃으며 그 별 곁으로 오는 보름달처럼 그렇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처럼 그대와 함께 하고 싶어요.
별보기도 지치면 이제 제 무릎을 베고 누우세요. 벽에서 나는 구수한 흙 냄새가 참 좋지요? 잠이 오지 않더라도 그냥 눈만 감고 계셔요. 저는 가만가만 섬집아기를 부를 게요. 이런 산골과는 좀 안 어울리지만 그래도 그 노래를 들으면 어머니의 품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쩌면 그대는 제가 미처 둘째 소절을 시작하기도 전에 코를 골지도 모르겠어요. 그대의 심장박동이나 규칙적으로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 저도 쉬이 잠이 올 것 같아요. 그래도 고이 잠든 그대의 평화로운 얼굴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마음 깊이 새겨두는 것이나, 수많은 사람가운데서 그대를 만난 감사의 기도를 잠들기 전에 잊지는 않을 거예요. 터무니없이 가졌던 욕심 다 버릴 테니 이렇게 그대와 함께 호흡을 나누는 시간을 더 많이 달라고 한다면 설마, 너무 많은 기도에 지친 신도 거절하진 않을 테지요. 저도 잠든 그대의 얼굴을 지켜보다 그대 곁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잠들면 제가 못다 부른 노래는 소쩍새가 마저 부를 거예요.
그대!
오늘 하루 모든 근심 다 잊은 아기처럼 잠드세요!
아침햇살이 엷은 창호지를 바른 문틈으로, 발뒤꿈치를 훔쳐보는 개구쟁이처럼 깨우러 올 때까지.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