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혼술
'글. 박순철'

코로나19가 물러갈 줄을 모른다. 옛날 그 지독하던 학질이나 전염병도 계절이 바뀌면 슬그머니 도망가곤 했는데 코로나19라는 역병은 3년째 버티고 있으니 가히 악질이다.
우암산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소갈 씨! 사람 사는 재미가 없는 듯 표정이 밝지 않다. 전 같으면 고향 친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우암산을 다녀와서 반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고 헤어졌지만, 이제는 그런 재미도 없다. 누구를 만나고 싶어도 그놈의 코로나19 때문에 만나자는 소리도 하기 어렵다.
353m의 우암산 정상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하다. 소갈 씨가 한창 산을 다니던 시절에는 40분에도 올라갔지만, 지금은 그렇게 금쪽같이 시간을 아껴야 할 일도 없고 그 아낀 시간을 재투자할 곳도 없으니 그저 몸에 무리 가지 않을 정도로 느릿느릿 올라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우암산 중턱에는 고 씨 샘터가 있다. 옛날에 고씨 성을 가진 분이 살았다고 하던 곳이다. 시청에서 수질검사 합격 통보서를 붙여놓아 등산객들이 안심하고 목을 축이기도 하고 수통에 받아가기도 한다. 소갈 씨가 표주박이 아닌 스테인리스 바가지로 물을 받아 마시고 일어나려는데 누가 등을 툭 쳤다.
“아니 소갈 친구 아니야?”
흘끔 돌아보니 옛날 시골 한마을에 살던 친구다.
“이게 누구? 동문이?”
“그래, 여전하구나”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소갈 씨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이게 얼마 만인가. 전에는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곤 했었는데 코로나19가 덮친 다음에는 자연 멀어지게 되었다. 3년여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동문이도 변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소갈 씨가 동문 씨를 보고 물었다.
“뭐, 할 게 있어야지. 아침 먹으면 손자 녀석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끝나면 모셔 오는 게 유일한 일이야. 친구는?”
“나는 손자 녀석 중학교 들어갔어. 그래서 그런 재미도 못 느껴?”
동문 씨는 객지로 떠돌아다니다가 늦게 결혼해서인지 후손도 늦은 것 같았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고 들어가지?”
동문 씨가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는지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소갈 씨에게 점심을 먹자고 한다.
“괜찮을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가면 좋지 않잖아?”
“이런, 그 소심한 성격 하군, 코로나인지 뭔지 마음 약한 사람에게는 달려들고 나같이 겁 없는 사람에게는 침투할 생각도 못 한다고.”
“너, 그 뻥은 아직도 건재하구나.”
“야, 지금 식당에 가봐라. 젊은 사람들은 우리 같이 망설이지 않고 자기네 하고 싶은데로 다하고 살아. 그러다 코로나 걸리면 병원에 가고….”
“너는 튼튼해서 괜찮은지 모르지만, 나는 약골이어서 대번에 걸린다. 코로나 끝난 다음에 만나서 점심 먹자. 내가 살게.”
“그래, 그럼 다음에 만나자. 정승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는데 코로나19를 방패막이로 들고나오니 어쩔 도리가 없구나.”
동문 씨가 사뭇 섭섭한 듯 입맛을 다시며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소갈 씨 마음도 개운찮기는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변화시켜 놓았다. 소갈 씨도 좋아하는 술 때문에 친구 따라 강남까지는 아니어도 밤새워 어울려 돌아다니며 청춘을 불사른 시절도 있었지만, 다 흘러간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야금야금 꺼내 되씹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버렸으니 이 일을 어쩌랴.
전 같았으면 얼씨구나 친구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을 것이다. 정부가 하라는 데로 따라 하는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소갈 씨이기에 그저 정부의 방역 정책을 이행하는 게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암산을 천천히 다녀온다고는 했지만, 땀에 축축하게 젖은 몸은 기분이 영 찝찝하다. 주섬주섬 목욕 가방을 챙기다가 산에서 만난 친구 동문이가 떠올랐다. 둘이서 점심 먹는 것까지야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미안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식당 같은 곳엔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에 하던 습관대로 목욕 가방을 들고 나섰다가 ‘아차’하는 마음에 세면실로 다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땀 흘리고 샤워를 마친 다음이라 그런지 상쾌한 기분이 몰려왔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 ‘딱 한 잔만!’ 소갈 씨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저께 마시다가 둔 소주 반병이 그대로 있었다. 자신이 마시지 않은 한 그냥 있는 게 조금도 이상할 리 없는데 귀한 물건을 얻은 듯 입가에 함박웃음까지 번진다.
“이 양반이, 조금만 기다려요. 안주 만들어 드릴게요. 어째 오늘은 산에 갔다 와서 그냥 넘어간다 했더니만….”
아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가 기름 냄새를 피운다. 소갈 씨는 땀 흘린 다음에는 술을 먹어서 그 힘듦을 풀어냈었는데 이제 아주 습관이 된 듯했다. 더구나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규제하면서는 혼자서도 술을 잘 먹는, 아주 좋지 않은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과음하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2홉들이 소주 한 병 따서 반 먹고 남겨 두었다가 다음에 마시니 알코올 중독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소주 반병을 마시고 나른한 기분에 취해있는데 ‘딩동댕’ 현관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문을 열고 나긴 소갈 씨 아내가 치킨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웬 치킨, 당신이 시켰어요?”
“아니요. 배달원이 그냥 주고 갔어요. 여기 무슨 메모가….”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으려는 친구 말이 일리가 있네. 코로나19 물러가면 그때 만나서 술 한잔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 보내는 술로 목이나 축이게. 김동문’
점심 같이 먹자고 하던 친구 동문이의 청을 거절한 게 미안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가 보낸 안주와 술을 외면하지 못한 소갈 씨! 치킨 한 토막을 꺼내 들었다. 고소한 내음이 방안에 요동쳤다. 동문 씨가 보내온 맥주병을 치우려는 아내를 제지하고 병뚜껑을 열었다.
‘친구와 둘이 마시니 더 맛이 좋군그래!’
모처럼 친구 덕분에 흡족한 양의 술을 마신 소갈 씨!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EDITOR AE류정미
박순철 작가
이메일 : tlatks1026@hanmail.net
1994년 월간『수필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 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중부매일『에세이뜨락』연재(2008∼2011)
충북일보『에세이뜨락』연재(2012∼2013)
충청매일 콩트 연재 (2015∼2018)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04년)외 다수
수필집『달팽이의 외출』『예일대 친구』『깨우지 마세요』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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