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봄이 전설이 될라
'글. 최명임'

꽃은 지천인데 나비가 없는 봄이 허우룩하다. 어디선가 명맥은 유지하고 있을까. 시골처녀나비도, 떠들썩팔랑나비도, 각시멧노랑나비도 옛이야기가 되고 있다. 나비 사랑에 일생을 바친 석주명 박사가 지은 이 아름다운 이름들 다 어쩌라고?. 지하에서 탄식하고 계실 그분의 나비들은 다 어디로 떠났을까. 꽃도 제가 나올 때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피었으되 나비가 없는 봄이 낯설다. 벌의 개체 수도 줄어든다니 봄을 이야기할 무리가 모두 떠나면 봄도 사라질까 겁난다. 이상기온으로 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가슴 아픈 예보가 심심찮게 들린다.
‘이러다 봄마저 전설이 될라.’
아직 봄은 때맞추어 오고 있다. 습한 공기가 덮쳐오고 열성 바람이 이르게 찾아와도 제 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희망과 걱정이 교차한다.
나비가 오지 않는 꽃밭에 벌이 분주하다. 꽃 속을 누비다가 여기다 싶으면 달려들어 물을 만난 고기처럼 철벅거린다. 날개가 지치도록 찾아들어 거두는 수확에 즐거운 비명이다. 벌이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잉큼잉큼, 꽃은 마법 같은 사랑에 빠진다. 마치 섬섬옥수로 뽑아내는 가야금의 사랑가처럼 내 가슴도 두근거린다.
꽃은 제 향기를 기억할 물질을 분비해 벌이 기억하게 하고 다음 해도 찾아올 수 있도록 유인책을 쓴다니, 꽃의 세계에도 삶의 명제는 뚜렷하다.



봄은 꽃이 피는 것만으로 봄이 아니다. 꽃 또한 피는 것으로 꽃일 수 없다. 벌나비도 없이 지는 꽃은 의미 없이 다녀간 인연처럼 쉬이 잊힌다. 애써 향기와 꿀로 구실을 만들어놓고 벌을 유혹하는 사연을 알만하다.
벌이 다녀가면 꽃은 의미 전환을 한다. 자기완성이다. 비로소 봄도 완성에 이른다. 바람을 빌어 열매를 맺는 꽃도 있으니 제 삶의 진정한 가치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고등동물만이 누리는 특권인 양 눈물로 인생을 논하고 가슴 뜨거운 고뇌를 나는 이 꽃밭에서도 보았다.
벌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려는데 앵앵거리며 달아난다. 양 옆에 매달린 꽃가루 뭉치로 몸이 무거운지 이내 옆에 있는 꽃에 내려앉는다. 행여 땀에 젖은 그 보따리 놓칠라 녀석의 행동거지가 위태위태하다. 어떤 놈은 성에 차지 않는지 허겁지겁하고, 옆구리가 빈털터리인 놈은 잽싸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당연히 보따리를 양옆에 꿰찬 놈이 성실하다. 인간의 시선은 편견이 심해 자주 오류를 범하는데 결코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무게에 휘청거리는 놈은 이른 새벽부터 설친 것 같지만, 느지막하게 나왔다가 겨우 한 짐 해서 욕심을 부리려니 어깨가 무거운 것이다. 지게를 미처 다 채우지 못한 놈은 아침에 꽃밭을 다녀갔거나, 아예 빈 지게로 나온 놈은 이른 새벽에 나와 두어짐 해놓은 잰 놈이 아닐까. 지극히 민주적이고 성실함의 대명사인 벌을 두고 내 관점으로 고민을 해결하고는 쿡쿡 웃는다. 사람을 볼 때도 제 관점으로만 보면 진면목을 보지 못하듯이 사실 내 안목으로는 이 민주적인 신사들의 진가를 다 알지 못한다.
벌은 결코, 제 이익을 위해서 꽃을 상하게 하지 않는단다. 벌과 나비를 사라지게 하는 인간의 이익 개념을 심히 부끄럽게 하는 녀석이다. 나는 그 아름다운 노동에 사뭇 숙연해진다.



어느 때부터인가 봄이 오면 희귀한 일이 벌어진다. 벌나비가 찾아와 사랑의 메신저가 되었던 낭만의 과수원에 사람이 벌이 되고 나비가 되어 화접을 한다. 흐드러지게 핀 배꽃 위로 무리 지어 날던 벌나비 대신 무미건조한 손이 오고 가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것도 모자라서 기계의 힘을 빌려 화접을 하니 허공을 가르는 기계의 차가운 감성으로 어찌 저 꽃이 알찬 열매를 맺을까. 벌 한 마리의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안일하게 낭만을 논하고 봉침의 약성을 노렸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잃어버린 것들은 때때로 낯선 모습으로 되돌아와 우리를 후려친다. 나비를 도둑맞은 봄과 마음을 도적질한 기계와, 별을 도둑맞은 하늘은 우리의 가슴을 훔치고 있다. 언젠가 우리의 절규를 예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도 사라진다는 선구자의 추상같은 엄포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문득 두려워진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 가장 적당한 시점에서 나비를 불러들이고, 벌이 떼를 지어 노는 길목에 봄이 허벌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오만과 거짓된 사랑을 내려놓고 자연이 인간에게 느끼는 괴리감을 줄여가야 할 때다. 먼 훗날 후손들이 봄의 전설을 이야기할 슬픈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그리움을 남기고 떠난다. 나비를 찾아 부단히 발걸음을 옮기는 나비 박사를 기다려도 좋을까. 그와 함께 나비가 돌아와 봄을 부추기고 벌이 부산하게 꽃밭을 누비면 봄이 영원하려나.
꽃이 핀다. 꽃이 진다. 공연히 지는 꽃이 서럽다. 지는 내가 서러운 건가? 머지않아 봄도 떠날 것이다. 다시 올 적에는 강남으로 떠난 제비를 불러 모아, 나비와 더불어 오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사립문에 웅크린 제비꽃이 실눈 뜨고 기다리던 몽환의 봄을, 내 까마득한 기억 속에 자리한 그 봄을 많이 닮아있으면 좋겠다.
나는 정녕 이 아름다운 계절을 잃고 싶지 않다. 아주 가지는 말라고, 임을 본 듯 반길 터이니 부디 다음을 기약하자고 달래보련다.
지금은 사월, 숨 가쁜 봄이다.

EDITOR AE류정미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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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니어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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