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이드

찰랑찰랑 무심천 발원지 따라
사람 사는 얘기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
'피반령 / 미테재 / 선비길, 퉁소바위 / 말미장터 / 계산리 오층석탑'

인생의 고갯길을 넘는다는 것은 험준한 인생여정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희로애락고개 넘어 만난 장터에서 봇짐처럼 부려놓은 이야기. 국밥 한 그릇에 배가 채워지고 술 한 잔에 불콰하게 취해지면 호기롭게 왁자지껄 희로애락 쉬엄쉬엄 풀어지는 곳
인생의 고갯길은 희노애락 _ 피반령
청주와 보은을 이어주는 가장 큰 고개가 피반령이다. 고개가 작으면 지명에 무슨 무슨 고개, 재, 티를 끝에 붙이고 험준하면 령자를 붙였다. 그만큼 피반령은 예로부터 험로였다. 임진왜란 때 출병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우리나라에서 인재가 나오는 걸 막으려고 피반령의 지맥을 끊으려고 하자 땅에서 피가 솟아났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지금은 고갯길이 넓혀지고 포장되어 차로 쉽게 오가게 되었지만 인차리나 계산리에서 걸어서 피반령을 올라가 보면 여전히 큰 고개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정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굽이굽이 걷는 수고로움을 달래게 된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련한 고향처럼 정겹다. 겹을 이룬 산맥들 사이로 마을과 논밭이 펼쳐져 있고 길과 길은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이 고갯마루에는 옛날에 영물이 살았다고 한다. 바로 호랑이이다. 회인에 사는 어느 할머니가 험한 고갯길을 걸어 청주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컴컴한 저녁 무렵이 다되어 집에를 가려고 재촉하고 있다. 그런데 건너편 산 위에 무언가 웅크리고 앉아 있어 가만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를 입지는 않을까 공포감이 몰려왔지만 할머니는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피반령 고갯마루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되었고 이 마을에서는 호환虎患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피반령을 넘었던 조선시대 임금이 세조이다. 조카 단종을 폐 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야기했던 세조는 죄책감과 회한의 세월을 불심으로 달랜 임금으로 유명하다. 말년에 지병 치료차 한양을 떠나 이 곳 피반령을 넘어 속리산 복천암에서 머물렀다.
피반령과 피반령 정상, 미테재

땔감 한 짐 지고 청주장으로 _ 미테재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았을 어느 촌부는 새벽에 지게 한 짐짊어지고 미테재를 넘었을 것이다. 농삿거리로는 큰 돈을 만질 수 없어 땔감을 마련해 미테재를 넘어 청주에 내다 팔았을 것이다.
봄에는 앵두 따다 팔고 가을에는 감 따다 팔면서 그렇게 식솔을 거느리고 자식들 공부를 가르쳤을 것이다. 보은에서 상주에서 피반령과 사흘티를 넘고 황청리를 지나 미테재에 닿아여기만 넘으면 된다 하고 넘었을 청주 가는 길, 미테재. 미테재는 그 옛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와 추억의 길이다. 보은이나 회인에서 길을 나선 사람도 피반령을 힘겹게 넘어온 뒤 여기 미테재에 와서는 한숨 돌리며 다 왔다 하고 안도하지 않았을까. 고개 너머 월오동에 닿을 생각에 힘겹게 다다른 무거운 걸음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마법의 고개가 되었을지도. 그렇게 역사와 추억이 깃든 미테재 초입에서 빠름을 요구하는 시대 흐름을 무작정 따르며 사는 길과 옛길 처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길 중에 어디에 삶의 무게를 둘지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左) 선비길 右)퉁소바위

망중한 즐기는 선비의 퉁소 한 가락 _ 선비길, 퉁소바위
반령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산 중턱에는 괴목공원 쪽에서 계산리로 내려올 수 있는 길이 있다. 물론 포장도로가 아닌옛길로 지역 어르신들은 이 길을 선비길이라고도 한다. 보은쪽에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다녔던 길이라 하여 선비길이라 하였다. 선비들은 이 길이 데려다주는 말미장터에서 하루를 묵어갔거나 주막에서 요기를 했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보자면 봇짐을 메고 바쁘게 먼 길을 떠나야 했을 선비. 무명 두루마기에서 바람소리가 나도록 걷고 또 걸어야 한양에 닿았을 선비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길이다.
이 선비길에는 선비의 풍류 가락이 울려나올 듯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로 퉁소바위. 길 가던 선비가 이 곳에 올라 퉁소를 불며 풍류에 젖었다 하여 이름이 지어진 퉁소바위. 여정을 잠시 멈추고 퉁소 선율에 심신을 가다듬었을 선비의 채취가 느껴지는 곳이다.
말미장터

흥정과 인심이 넘실대던 그리운 장터 _ 말미장터
선비길을 따라 계산리 마을에 다다르면 말미장터가 나온다. 주막도 있고 작은 시장도 열리니 나그네에게 여독을 풀어주기에 그만인 곳이었으리라.
고달픈 길손이며 선비와 과객들과 장꾼들이 부려놓은 봇짐처럼 널브러져 쉬었다 국밥 한 그릇에 급한대로 허기를 달래고 여유가 있으면 탁주 한 잔에 불콰하게 취기도 더하였을 것이다. 호기롭게 왁자지껄했던 과거의 장터 모습은 마을 벽화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200년이 넘은 팽나무 아래로 봇짐 메고 길을 나서는 장꾼 모습이 운치있게 표현되어 있다. 낯선 마을 사람들의 풋풋한 삶을 엿보기도 하고 이해해 보며 내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역시 장날의 장터였다. 생전처음 보는 사람과 흥정을 해도 눈을 마주쳐야 하고, 서툰 셈을 하는 것을 보면 덤이 하나 더 얹어지고... 흥정과 인심이 넘실대던 그 때 그 시절 장터가 그립다.
보물 제511호 계산리 오층석탑

청주에서 가장 큰 고려 석탑 _ 계산리 오층석탑
산속 절을 찾아가 하늘을 향해 세워진 탑을 보게 되면 한번쯤 간절한 소원을 담아 합장 기도를 올리고 싶은 게 평범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탑 주변을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돌고나면 차분히 가라앉는 마음에 한결 세상 시름을 놓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계산리 오층석탑에서는 탑돌이보다는 한바탕 뛰어놀고 굴러도 보고 재미나게 놀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계산리 오층석탑은 청주 지역에서 가장 큰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5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앞쪽으로 2천여 평의 너른 마당에 잔디광장과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절의 다른 부속건물 들은 폐사하고 석탑 한 기만 남아 있지만 매우 큰 절이 있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매년 8월이면 이 지역과 자매결연을 맺은 대학에서 한여름밤의 작은 음악회를 연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밤 한적한 폐사지에서 오래 남을 추억도 간직해봄직하다.

EDITOR AE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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