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호박전
'글. 이정연'

뜨거운 김이 나는 접시를 안고 아버님은 감격에 겨워 소리치셨다.
“옛날에 엄마가 해주던 바로 그 맛이야!”
잘 익은 호박이 눈에 띄어 한 장 부쳐본 호박전에 아버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을 듣자 나도 깜짝 놀랐다.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 점잖은 어른의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아버님께도 감격에 겨워 그리워할 어머니가 계셨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다. 팔순을 앞둔 아버님이 여태 할머님의 손맛을 잊지 않고 계신다는 것도 감동이지만 그 호박전 맛 속에 나처럼 쓰라린 가난도 함께 묻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어릴 적 추석이 되면 어머니는 호박전을 많이 부치셨다. 할머니가 계시니 명절이면 집엔 손님이 많았고 손님상에 올릴 음식은 늘 부족했다. 가난한 살림에 그 많은 상에 송편을 내갈 형편은 되지 못하니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계절에도 어머니의 추석은 가난했다. 마당에 무쇠 솥뚜껑을 올려놓고 호박전을 부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우리 집은 왜 송편을 안 하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내년에는 우리도 꼭 송편을 만들자고 나를 달래고 내년이 오면 송편은 또 내년이 되어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내게도 더 이상 어머니께 그런 투정을 부리는 것은 죄가 된다는 눈치가 어렴풋이 생겨 버렸다.





밭둑 아무데나 구덩이를 파고 넣은 호박씨앗은 밭둑에 잡초가 나는 것도 방지할 뿐만 아니라 보드라운 잎은 밥솥에 쪄서 강된장에 쌈을 싸 먹으면 또한 별미다. 잎 속에 절반쯤 숨은 누런 호박을 마치 소변보는 시골 아낙을 보쌈 해 오듯 따와서 대청마루에 놓으면 벌써 마음은 한가위다. 호박전을 맛나게 부치려면 우선 잘 익은 호박을 골라야 한다. 요새는 호박 긁는 기구도 있지만 달창이 숟가락으로 긁어서 부쳐야 호박속의 수분이 많이 나와 감칠맛이 더하다. 긁은 호박에 먼저 간을 하고 나중에 체에 친 밀가루를 넣어야 반죽이 너무 질지 않게 된다. 알맞게 반죽한 것을 프라이팬을 뜨겁게 달구고 기름을 바르는 느낌으로 해야지 쏟아 부으면 호박전이 느끼하다. 지금이야 도시 생활을 하니 어쩔 수 없지만 제대로 된 호박전을 부치려면 시골집 마당에 장작불을 피우고 무쇠 솥 뚜껑에다 부쳐야 맛이 더하다. 기름도 주르르 부어서는 안 되고 다른 그릇에 조금 따르고 무나 가지 자른 것에다 무쳐서 솥뚜껑에 살짝 바르는 느낌이 나게 써야 한다. 비스듬히 기운 솥뚜껑에선 그렇게 바른 기름조차 음식에 스미지 않아 어떤 전을 부쳐도 맛이 담백하다. 노릇하게 지져낸 호박전을 넓은 대나무나 싸리광주리에 담는다. 성근 광주리 아래로 그나마 남아있던 기름기까지 빠지고 한 김이 나가면 무명이나 삼베 보자기를 덮어 장독에 올려 둔다.





한참 놀다 와보면 어머니는 용수 지른 술독에서 조심조심 청주를 떠내시거나 아니면 쑤어 둔 도토리묵이 알맞게 굳었는지 눌러 보고 계셨다. 배가 고픈 나는 혼자 장독대로 가서 삼베보자기를 들추고 호박전 하나를 집어 죽죽 찢어 먹는다. 그렇게 먹는 맛이 바로 호박전의 진미다. 어릴 때는 그것이 진미인줄 몰랐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맛은 내게 간절한 그리움이 되었다. 나는 아직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잘 익은 호박이 눈에 띄면 호박전부터 부쳐보지만 어릴 때 어머니가 부쳐 주시던 맛에는 견줄 수가 없다.
치맛자락을 잡고 송편을 달라고 보채는 막내를 달래는 어머니의 가난한 추석은 나이가 들수록 가슴 아프다. 온화한 웃음으로 ‘내년에는 꼭’ 하며 희망을 주시던 어머니가 있는 추석, 고향 마당의 정다운 풍경을 내 아이들에게도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흔히 있는 재료에 정성을 담은 소박한 음식이 더 큰 행복을 불러오는 것임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알려 줄까. 아이들이 나처럼 부모가 되었을 때 나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음식 하나 없다는 게 미안하고 슬프다. 다시 고향집 마당에서 어머니가 부친 호박전을 먹어보고 싶다. 신은 내게 어머니를 주시고 미처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알 시간도 주지 않고 데려가 버리셨다. 어머니의 호박전을 다시 먹을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지만 아직 내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설픈 솜씨라도 고향집 마당에서 가마솥 솥뚜껑에다 내 어머니가 하시던 것처럼 해본다면 옛날 그 호박전 맛이 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저만치 산중턱에서 우리 딸 잘 한다 내려다보실 거고 고향집 마당은 수풀 속에서 나를 기다린다.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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