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추어탕
'글. 이정연'

"가자 응? 오빠 혼자 심심하잖아? 응?"
열여섯 살 터울의 오빠가 눈꼬리 가득 웃음을 담고 막내 누이인 내게 어리광 피우면 나는 금방 또 마음이 약해졌다. 내일은 숙제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말을 해도 가지 말아야지 단단히 별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혼자 일하러 갈 때면 오빠는 번번이 내가 상상하지 못한 기발한 방법으로 기어이 나를 데리고 갔다. 대나무 잎으로 앙증맞은 배를 만들어 주는가 하면 어떤 때는 옥수수수염으로 갈래머리를 정교하게 땋아 내린 풀각시를 들고 꼬드겼다. 뒤란 풀숲에서 용케도 꽈리 하나를 찾아내 곱게 파내고 청개구리가 입에 들어가 오빠 죽게 생겼다면서 뽀드득뽀드득 꽈리를 불었다. “오빠 제발 죽지 마! 따라 갈게!” 하면서 울면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뜨고 기침을 하는 척 몰래 꽈리를 뱉었다.
그해 가을날도 오빠는 가기 싫다는 내게 다래도 따줄 게 머루도 따줄 게 달래보다가 그도 싫다고 하자 쇠죽 솥 앞에 있던 양동이를 번쩍 치켜들고 “그러면 여기 가득 고기 잡아 줄게 벼는 조금만 베고 고기나 잡자!” 그래서 우리는 재 너머 논으로 벼를 베러 갔다. 따가운 햇볕 아래 나는 오빠의 지게꼬리를 잡고 아장아장 따라가고 오빠는 한 번씩 뒤돌아보고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가뜩이나 가기 싫은데 되돌아 가버릴까보다 볼멘소리를 하면 오빠는 나를 번쩍 안아 지게에 올리고 성큼성큼 고갯마루로 올라섰다. 산에선 막 피기 시작한 억새가 은빛으로 날리고 개옻나무 잎사귀는 산발치마다 섬뜩하도록 붉었다. 산에서는 온갖 열매 익어가는 단 냄새가 풍겨오고 오빠는 ‘남원의 애수’ 같은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했다. 지게에 올라앉아 바라보는 골짜기엔 드문드문 남은 벼가 누렇게 출렁 이고 나도 따라서 출렁거리다가 현기증이 날 무렵 오빠는 ‘큰골’ 우리 논에다 나를 내려놓았다.
다른 집 논은 이미 벼를 다 베어 가고 우리 논에만 노랗게 남아 있었다. 삿갓배미 작은 다랑논이 우리 논이었다. 갓 베어낸 벼 포기마다 구수한 냄새가 번져 나와 골짜기에 가득 찼다. 내가 논둑에 앉아 메뚜기를 잡는 동안 오빠는 다랑논 두 배미 벼를 금방 다 베고 고기 잡으러 가자고 했다. 가지런히 널어놓은 벼가 마치 우리 방 아랫목에 펴놓은 무명이불 같이 포근했다.





하얀 뭉게구름이 잠긴 말간 개울에 고기가 있을까 싶은데 오빠는 어느새 개울물을 막아 빈 논으로 물길을 돌려놓았다. 막아 놓은 개울 아래로 작은 웅덩이 한 세 개쯤 지나치더니 여물 주걱으로 물을 푸기 시작했다. 나도 오빠 옆에서 고무신을 벗어 물을 퍼냈다. 웅덩이에 이젠 단풍든 산도 흰 구름도 사라지고 대신 완강한 오빠의 정강이가 잠겼다. 그 옆에선 나는 오빠 허리띠를 잡고 꼼지락거리는 물고기 때문에 발바닥이 간지럽다고 자지러졌다. 여기저기서 파닥거리며 고기가 뛰기 시작했다. 나는 오기 싫다고 보채던 것도 잊고 신이 나서 고기를 주워 담았다. 다 담은 줄 알았는데 오빠가 물에 잠긴 갈대 뿌리를 밀쳐내자 그 아래서 미꾸라지가 수도 없이 기어 나왔다. 웅덩이 두 개를 더 그렇게 푸고 나니 우글거리는 고기가 너무 많아 양동이 밖으로 기어 나오는 놈까지 생겼다.
양동이를 들여다보고 어머니가 반색하셨다. 일 많은 가을철 추어탕 한 솥 끓여 놓으면 며칠 반찬 걱정은 들게 된다. 어머니는 거친 호박잎으로 소금을 뿌려둔 미꾸라지를 깨끗이 씻어 삶고 얼갈이배추도 데쳐 놓았다. 아버지는 벼는 다 베었는가는 물어보지도 않고 공연한 참견을 하시며 입맛을 다시고 어머니는 솥을 걸어 둔 마당으로 부엌으로 종종걸음 치셨다. 오빠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언니는 동네 어른들을 모시러 갔다. 미꾸라지는 이제 형체도 없이 살로 발라지고 된장과 고추장으로 무친 우거지 속으로 잠겼다. 미꾸라지는 죽어서 더욱 완전해 졌다. 살아서는 그저 비린 냄새를 풍길 뿐이었지만 죽어서는 구수하고 그윽한 향으로 한 그릇 뚝배기 속의 기막힌 맛이 되었다. 저 홀로는 그저 맵디매울 뿐인 초피나무 열매도 추어탕에 없어서는 안 될 향신료가 되듯, 고향 사람들도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 뚝배기 속의 탕처럼 한 마당에서 구수한 사람 냄새를 풍기며 어울렸다. "한 그릇 더 들게!" "아이고 배불러요!" "추어탕은 소화가 잘되느니……" 달그락달그락 어머니의 설거지 소리는 자장가처럼 멀어지고 나는 일찍 잠들었다. 꿈속에서도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진 발가락을 하고 고기를 잡느라 밤새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다시 초가을, 추어탕의 계절이 왔다. 음식점마다 '추어탕 오천 원' ‘자연산 추어탕' '특미 추어탕' 하고 선정적인 메뉴를 내걸어 놓았다. 추어탕 글씨만 봐도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어 무작정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 본다. 추어탕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여 보지만 그때 그 맛이 아니다. 초피나무 열매 가루 알싸한 향처럼 번져오는 고향 집 마당의 추억, 어디선가 또드락또드락 홍고추 풋고추 다지는 소리 그 부산한 가을 저녁이 그립다.
한때 맛이란 것은 일류요리사의 손끝이나 예민한 미식가들의 혀끝에 있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 맛은 잠시 혀끝을 감미롭게 하는 것일 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그리운 맛은 그 주소부터가 달랐다. 그건 내가 맛을 알아갈 무렵 오래전부터 가슴으로 기억되는 정취 같은 것이었다. 그 맛이야말로 영혼을 위로해 줄 진정한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가을 고향 집 마당의 추어탕 맛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추어탕 맛도 고향의 개울물처럼 세월이라는 강을 흘러 먼 바다로 가 버린 것일까.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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