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무명감독
'글.박종희'

퇴근하는 딸애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운전하면서 울었던 모양이다. 괜찮다는 듯 애써 웃음 짓는 딸애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있는 남편의 얼굴도 함께 시무룩해 보인다. 냉동실에서 꺼낸 생선을 녹이면서도 신경은 온통 딸애한테 쏠려있다.
얼마 전부터 출근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더니 딸애가 요즘 유독 힘들어 보인다. 환하게 웃으면서 들어와도 안쓰러운데 출퇴근 길 얼굴이 창백하니 집안 분위기도 어둡다.
딸애가 직장인이 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공부한 지 1년 만에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해 신분증을 얻은 딸애는 첫 출근을 하면서 연둣빛 설렘으로 가득 찼었다.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바뀐 일상에 신기해하며 흥미로워했다.
학생 티를 벗으며 2년 간은 제법 직장에 잘 적응하는 듯했다. 공무원이지만, 퇴근 시간이 빠른 직종이라 딸애는 취미활동도 하면서 나름 성취감을 느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뒤, 본청으로 발령받은 딸애 얼굴에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다. 퇴근하면 조잘조잘 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집안에 웃음꽃을 피우던 딸애 입에서 짜증이 묻어 나왔다.
딸애가 받는 스트레스는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완벽한 성격을 지닌 딸애는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도 업무처럼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나, 조직사회에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비정상적인 일들이 생기며 거부를 못하는 딸애의 책상에는 차츰차츰 일이 쌓여갔다. 몸이 조금 힘들더라도 직장 분위기가 좋으면 된다고 여기던 딸애의 성격도 한몫한 것 같다. 일찍 퇴근하는 것이 좋아 선택한 직종인데 딸애의 퇴근 시간이 점점 늦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자정을 넘겨 퇴근하고 예정에 없던 출장도 잦았다.
어느 날, 딸애가 직장을 그만두어야겠다고 했다. 조직 사회가 맞지 않아 너무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떻게 들어간 직장인데, 가슴이 철렁하고 고민이 많아졌다. 딸애한테 정말 조직문화가 안 맞는 건가, 문득 딸애가 중학교 다닐 때 진로문제로 속을 태우던 때가 생각났다.
딸애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애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느냐고 하니, 다른 친구들은 이미 진로를 정했는데 자기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 속상하다는 거였다.
딸애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같은 반에 있는 친구가 고등학교 진학 문제를 앞두고 자기는 실업계인 정보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데 친구 엄마는 무조건 인문계에 가라고 해서 다투었다는 내용이었다. 자식의 성적과 적성에 상관없이 무조건 인문계를 가야 한다는 친구 엄마 때문에 딸애도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나를 떠올렸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 공무원이 되기 싫었던 나는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 살아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여자로서 최고의 직업이 교사라는 말을 하며 은근히 딸애가 교사가 되길 원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가꾸는 화초처럼 자란 나는 내 자식도 내 의지대로 무조건 따라와 주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혼하고 어떤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준비와 각오도 없이 덜컥 엄마가 되었다. 더불어 딸애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까지 되어버렸다. 나는 딸애를 관객도 없는 무대 위에 올려놓고 늘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다.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배우의 능력은 아랑곳없이 내 마음대로 대본을 고치며 이런저런 포즈를 요구했다.
그렇게 이름도 없는 감독이 배우의 개성과 적성은 무시한 체, 오로지 감독이 원하는 배우, 작가가 원하는 콘셉트에 맞추길 바라면서 딸애의 미래를 디자인했던 것 같다. 한데,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15년을 살아온 배우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딸은 왜, 나는 엄마 아빠가 원하는 것을 해야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서럽게 우는 딸애한테 부모이기 이전에 먼저 산 선배로서 현실과 이상에 대한 경계를 설명했지만 딸애는 납득이 안 간다는 눈치였다.
남편을 닮아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딸애는 틀에 맞추어진 직업보다는 전업 작가나 스타일 푸드리스트가 되고 싶어 했다.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딸애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배우를 만들었다. 그때,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딸애는 정말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딸애의 꿈을 빼앗아버린 것이 미안하고 직장생활에 지친 딸애가 안쓰러워졌다.
자기가 키운 배우를 정상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것이 감독의 욕심이다. 배우의 성격과 재능은 무시하고 오로지 작품의 흥행만을 생각하는 감독의 이기심이 어쩌면 배우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맛없게 저녁을 먹으면서 처음엔 누구나 직장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위로했지만, 딸애의 마음은 쉽게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타고난 자질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감각 있고 유능한 감독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배우의 인생도 좌우되는 것 같다. 당장은 어떤 결정도 내리기 어렵지만, 시간을 두고 딸애를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유연하게 고민해야겠다. 딸애도 이번 고비를 잘 넘기고 현명하게 대처하리라 믿는다.
딸애 때문에 대본도 없고 조감독도 없었던 옛날에 여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훌륭한 배우로 키워주신 친정 부모님이 생각났다. 어머니들은 눈 속에 심은 나무 한그루 키우며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자식들은 알기나 할까.

EDITOR AE류정미
박종희 작가
이메일 : essay0228@hanmail.net
2000년 『월간문학세계』수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전국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김포문학상
201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제1회 119 문화상 소설 최우수상 수상 외 다수
2008년 ~ 2019년까지 중부매일, 충북일보, 충청매일에 수필 연재
저서: 수필집 『가리개』『출가』
한국작가회의, 한국산문작가협회, 충북작가회의 회원
청주시, 세종시 수필창작 강사.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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