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고향의 봄
'글. 이정연'

동창회 체육대회가 일찍 끝나 친구들과 우르르 우리 시골 마을로 몰려갔다. 소꿉친구 영이 고향에 새로 집을 지었다고 했다. 부모님을 위해 낡은 집을 허물고 아담한 목조주택을 지어서 집 구경도 하고 동기회에 오지 못한 한 친구가 있어 안부가 궁금해서였다. 친구들이 차 한잔할 동안 나는 잠시 무너져 폐허가 되어 있는 우리 집터에 다녀온다고 살짝 일어났는데 늦은 시간에 혼자 거기에 가려고 하느냐며 친구들이 모두 따라 일어났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내 어릴 적 보금자리, 노산이어서 어머니를 사경에 빠트리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이제는 무너져 폐허가 되어버린 그 집에 나를 혼자 보내지 않고 친구들이 함께 가 준다고 해서 참 고마웠다.
내 고향집 마당에 서 있는 것으로도 몸이 떨렸다. 고향은 늘 이렇게 여기 변함없이 있는데 내가 떠나고 내가 또 그렇게 그리워하였구나. 몇 타래 남은 시래기로 죽을 끓여서 미안하게 들고 들어오시던 어머니의 슬픈 저녁상과 먼지 속에 종일 풍구질을 하시던 아버지, 민들레처럼 납작 땅에 엎드려 내내 골목길의 풀을 뽑던 할머니, 먼 하굣길 허기져서 어머니라고 부를 기운도 없이 돌아와 쓰러지던 내 가여웠던 언니까지 슬픈 동화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어디를 둘러봐도 애틋하고 그리운 추억이 아른거렸다. 눈 가득 눈물을 담고 마당에 붙박여 있는 내게 친구가 달래를 한 줌 손에 쥐여 주었다.



뒤란에 서서 엄나무가 두통에 좋다고 올려다보는 녀석, 밭둑에 냉이가 많다고 꼬챙이로 냉이를 캐는 녀석, 울 밑에 난 상사화를 보고 상사화의 내력에 대해 아는 척하는 녀석 나이는 이제 다들 지천명을 앞두고 있지만, 고향 마당에 흩어져 있으니 아직도 사십 년 전 개구쟁이 그대로였다. 어릴 때는 그저 산발치에 아무렇게 서 있는 나무처럼 길가에 무수한 돌멩이처럼 무심했던 녀석들이 내 그리운 고향 속의 정물들처럼 새삼스레 정겨웠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마을 초입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왔다. 다른 친구들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한 친구가 방금 꺾은 복숭아꽃을 쥐고 산으로 올라간다. 산 입구에 복숭아꽃 천지로 놔두고 자꾸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참 재미있는 친구구나 하였다. 누구에게 주려는 것일까. 아내에게 준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고 평소 은근한 눈길을 보내던 근처 술집의 마담이라고 해도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상은 온통 꽃 잔치로 흥겨운데 봄날 한때 다른 여인에게 주는 한 다발의 꽃이 친구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꽃다발을 받는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더구나 녀석은 이제 낼모레면 쉰을 바라본다. 하늘의 이치를 알만한 나이가 아닌가. 남몰래 꽃다발 하나쯤 건넬 존재가 있어도 친구는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킬 것이다. 내가 혼자 멋대로 상상하며 자신을 저울질하는지도 모르고 친구는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얼마 전엔 등산도 포기하고 산 입구에 남아 있었던 사람이 그냥 오르기도 버거운 산을 무엇을 찾는지 두리번거리며 올라간다. 친구들이 ‘짜식 생전 안 하던 짓을 한다.’고 놀려대도 아랑곳없이 친구는 더 깊은 산 속으로 올라갔다.
다들 꽃에는 무심할 나이 저렇게까지 꺾어 모아야 하는 친구의 순정이 눈물겹다. 꽃다발을 받는 사람이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길 간절히 바랐다. 마침 저녁 준비가 다 되어 나도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 옛이야기에 젖어 꽃다발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돌아올 때 친구가 소담한 꽃다발을 내 가슴에 안겨 주었다. 한 손에 쥐기 버거울 정도의 꽃가지들을 노끈으로 동여맸다.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쟤는 여자한테 평생 처음으로 줘 본 꽃다발일 거라.’고 놀렸다. 친구는 겸연쩍게 웃었고 내 얼굴은 잠시 복사꽃 빛이 되었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집에 돌아와 살펴보니 매화 산벚꽃 복숭아 앵두나무 생강나무 쥐똥나무에 하얀 꽃이 조롱조롱 귀여운 조팝나무까지 있다. 고향 산을 그대로 우리 집 거실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왜 친구가 그토록 산비탈을 기어올랐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제일 아끼던 꽃병을 꺼내 꽂았다. 은은한 꽃향기, 고향의 냄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앵두나무 작은 꽃잎이 거실 바닥에 오롯이 떨어져 있다. 그 자리를 피해 비질을 하였다. 어떤 정물화도 그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것 같았다. 꽃핀 자리보다 꽃이 진 자리가 더 크게 마음을 울리는 줄 처음으로 알았다.
초등학교 육 년 내내 한 교실에서 뒹굴며 지낸 사이 새삼스레 내가 사랑스러울 리도 없다. 폐허가 된 고향집 마당에 공허하게 서 있던 내 눈빛을 보았던 것일까. 고향 산천의 꽃 한 줌을 꺾어주며 향수를 달래주고 싶었을까. 어쩌면 친구도 나처럼 가슴 속엔 늘 고향 생각으로 가득 한지 모른다.
해가 가고 다시 봄이 되었다. 방에 누워 천장에 고향의 봄을 그려본다. 살구꽃이 피는 건너편 집 마당에 개나리꽃을 물고 병아리가 종종걸음 친다. 어린 파 향기가 알싸한 텃밭에서 어머니가 나물을 캐신다. 아무 데나 돋아나 자디잔 꽃을 피우는 냉이 손만 내밀면 밭둑 어디나 흔한 달래 나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바구니와 호미를 찾아 든다. 집을 나서면 마을 앞 실개천엔 갯버들이 춤추고 산발치마다 흐드러지던 벚꽃 진분홍으로 나를 유혹하는 복숭아꽃 너무 그리워져서 그만 눈을 감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복숭아꽃이 흐드러진 산속을 꽃가지를 꺾어 든 남자가 미끄러지며 올라가고 있다. 황혼빛을 등에 담뿍 받고 마치 그 햇살에 떠밀려 올라가듯 친구가 고향 산을 자꾸 오르고 있다.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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