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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학습자 위해 나선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2024-04-01

비즈니스 피플조명


정책주간지 K-공감
느린 학습자 위해 나선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느려도 괜찮아! 경계선 지능인 699만 명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합니다”'

    경계선 지능은 말 그대로 지적으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지적장애의 기준은 지능지수(IQ) 70 이하(평균 IQ 85 이상)로 본다. 경계선 지능인은 IQ 71~84에 해당한다. 일상적인 대화나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지만 대인 관계가 서툴고 학습 능력이 확연히 떨어진다. 이로 인해 느리지만 천천히 배워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느린 학습자(Slow Learner)’라고 불린다.
    2023년 7월 공개된 국회입법조사처의 ‘경계선 지능인 현황과 향후 과제 보고서’는 느린 학습자를 699만 명으로 추정했다. 전체 인구의 약 13.6%에 해당한다. 지적장애 집단(2.3%)의 약 6배에 이르는 규모다. 느린 학습자는 한 한급당 2~3명이 있을 정도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지만 사회의 인식과 관심에서 소외돼 있다. 전문가들은 어릴 때 발견해 꾸준히 교육만 받아도 인지능력이 좋아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느린 학습자를 위한 맞춤형 교육이나 환경,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시중에 나와 있는 책 중에 느린 학습자를 위한 책은 찾아보기도 어렵다.

 
느린 학습자를 위한 읽기 쉬운 책과 콘텐츠, 교육 환경을 만드는 비영리단체 ‘피치마켓’을 운영하는 함의영 대표 (사진. C영상미디어)



    피치마켓 함의영(41) 대표는 이 문제에 주목했다.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에서 기획협력팀장으로 일하던 그는 퇴사 후 느린 학습자를 위한 책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2015년 비영리단체 ‘피치마켓’을 설립하고 글을 이해하기 힘든 느린 학습자와 발달장애인이 글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읽기 쉬운 책과 콘텐츠, 교육환경을 만들고 있다. 학교나 교사들과 협력해 특수학급 학생들의 교육과정에도 참여한다.
    피치마켓은 경제학 용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보의 불균형으로 저급한 상품이 넘쳐나는 ‘레몬마켓’과 반대로 피치마켓은 물건을 사고파는 이가 상품의 균등한 정보를 알 수 있어 좋은 제품이 유통되는 시장을 말한다. 정보가 평등한 피치마켓 같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함 대표의 꿈이 담겼다.
    지난 1월 1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라이브러리피치를 찾았다. 피치마켓과 도서문화재단 씨앗이 함께하는 이 도서관은 느린 학습자를 위한 피치마켓의 책으로 가득했다. 피치마켓이 만든 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등 각종 세계 명작, 청소년 필독서 등의 문학도서부터 자기계발서, 노동법과 선거공약집까지 다양했다. 책장에 가득한 책만큼 함 대표의 꿈은 가까워졌을까? 함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왜 느린 학습자에 주목했나?
    직장에 다니던 시절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멤버에게 발달장애인 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발달장애인은 청소년이나 성인이 되고도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동용 동화책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살아가면서 글과 책을 멀리하게 된다. 이로 인해 교육기회에 제약이 생기고 정보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발달장애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사업을 시작하고 알아갈수록 이런 어려움은 발달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놓인 경계선 지능인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비장애인 중에서도 소외계층의 특성상 격차가 생길 수 있다. 발달장애인, 경계선 지능인뿐 아니라 문해력이 부족해 쉬운 글과 정보가 필요한 느린 학습자를 위한 책이나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느린 학습자를 위한 책은 어떻게 다른가?
    느린 학습자는 인지능력이 낮고 단기 기억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엮이면 혼란을 겪는다. 갑자기 등장인물이 많아지거나 화자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 큰 맥락이나 주요 사건들은 동일하게 가져가되 작품 속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연대기 순서대로 재구성한다. 다음으로 시점을 통일하고 자연스럽게 글이 읽힐 수 있게 만든다. 그런 다음 작품 속 단어 하나하나를 쉬운 단어로 바꾼다. 
원래 책과 차이가 날 수도 있겠다.
    느린 학습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글을 쉽게 바꾸는 걸 목표로 한다. 다만 ‘쉽다’의 기준은 학습자마다 다르다. 보통 70% 정도의 느린 학습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글의 수준이 지나치게 낮아질 경우에는 책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정보의 깊이가 지나치게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가 어려운 30%의 학습자를 위해선 이미지나 영상 등 글이 아닌 방식으로 글의 내용을 구현하고 이해를 돕고 있다. 
지금까지 만든 책은 몇 권 정도인가?
    단행본과 매거진을 합쳐 300권 정도다. 혼자서 처음 시작했을 땐 1년에 한 권을 겨우 만들었다. 지금은 특수교육을 비롯한 전문 인력이 모이면서 한 달에 두세 권 정도를 제작한다. 분야도 문학에서 비문학까지 다양하다.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비장애인은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문학작품을 접한다. 하지만 느린 학습자들은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작품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부모가 독서를 권장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다 보니 또래끼리 대화를 나눌 때 정보의 깊이가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봤다. 그래서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작품, 청소년 필독서를 위주로 선정한다. 느린 학습자들이 또래가 읽는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비문학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선택한다. 선거공약집은 느린 학습자의 참정권과 직결된다. 느린 학습자도 공약을 이해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우리가 직접 쉬운 글로 옮긴 공약집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밖에도 근로계약서나 노동법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선정하고 있다. 
시행착오는 없었나?
    처음 출간한 책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유명한 문학작품이고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마음에 들었다.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느린 학습자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혼자서 1년 동안 고군분투하며 30번 이상의 퇴고를 거쳐 책을 만들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내게만 쉬운 책일 뿐 느린 학습자에겐 쉬운 책이 아니었다. 이후 서울의 한 특수학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1년간 발달장애인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숙제도 하고 소풍도 갔다. 특히 매일 학생들이 글쓰기를 했는데 그걸 필사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쓰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든 두 번째 책은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덕분에 꾸준히 책을 만들고 있다.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나?
    초창기 독자 중에 “40년 만에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분이 있었다. 우리를 통해 이런 변화가 생기고 도움이 됐다는 게 기뻤다. 한 독자는 책을 읽고 엄마와 처음으로 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고도 했다. 우리 책이 마중물이 돼 꾸준히 책을 읽고 공부해서 검정고시에 합격한 분도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큰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 만들고 싶은 책이 있다면?
    ‘카카오톡 설명서’다.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톡이지만 느린 학습자들이 세세한 사용법을 알기는 어렵다. 그들에게 각 기능과 사용법을 쉽게 알려주는 설명서가 필요하다. 또 느린 학습자들이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 혼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쉬운 설명서도 만들고 싶다. 
피치마켓의 목표도 궁금하다.
    교육을 받기 위해 느린 학습자들이 집을 떠나지 않고도 가까운 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전문가와 협업하고 또 느린 학습자를 위한 책과 콘텐츠를 만들면서 현장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 
느린 학습자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겠다.
    정부 예산이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전에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느린 학습자에 대한 인식이 먼저다. 그래야 그들을 위한 정책도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느린 학습자를 향한 사회적 관심과 변화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