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암투병 딛고 돌아온 최고령 현역 발레리노 이원국

2024-04-22

비즈니스 피플조명


정책주간지 K-공감
암투병 딛고 돌아온 최고령 현역 발레리노 이원국
'이쇼라스! 한 번 더! 57세의 발레리노가 오늘도 무대에 서는 이유'

    비 온 뒤 하늘에만 무지개가 걸리는 게 아니다. 무용수의 땀방울이 조명을 통과하는 찰나 무대에도 무지개가 뜬다. 57세의 현역 발레리노 이원국 씨는 지금껏 이 무지개를 좇아왔다.
    10대의 그는 가출청소년이었다. 학교는 그를 문제아라고 낙인찍었고 학교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 노동, 음식 배달, 호객 아르바이트였다. 고향 부산을 떠난 그의 마지막 발걸음은 서울 난지도였다. 쓰레기를 분류하는 일을 하다가 문득 하늘의 노을을 봤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소년 이원국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말없이 아들을 맞아줬다. 그리고 그에게 발레를 권했다. 피아노, 수영, 축구, 보디빌딩, 서예 등 모두 작심삼일로 끝났는데 발레는 달랐다. 대부분 5~6세에 입문하는 발레를 그는 18세에 시작했다. 늦은 만큼 간절했다. 하루 6시간 이상 연습했고 발꿈치를 수직으로 들어올려 발끝으로 서는 ‘를루베’ 동작을 매일 1000번씩 했다. 회전력을 키우기 위해 양쪽 다리에 2㎏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점프를 연습했고 계단을 오를 때나 잠을 잘 때도 모래주머니를 빼지 않았다.

 
18세에 발레를 시작한 이원국 발레리노는 57세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는 ‘영원한 현역’이다.(사진. C영상미디어)



    10년에 할 연습을 1년에 몰아서 한 덕분에 이 씨는 발레를 시작한 이듬해 부산 KBS 무용콩쿠르에서 은상을 받았고 1988년 중앙대 무용학과에 입학했다. 1989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주역 무용수, 루마니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국립발레단 수석 단원을 거쳤다. 그의 기록은 대부분 ‘최초’였고 그의 동작은 ‘한국 발레리노의 교과서’가 됐다. 이후 이 씨는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 발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원한 현역, 최고령 발레리노’라는 그의 수식어 앞에 최근 또 다른 수식어가 붙었다. ‘암투병을 딛고 무대에 선 최고령 발레리노.’ 54세이던 2021년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 2년의 항암치료 후 그는 다시 무대에 섰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동작은 그대로, 무수한 땀방울과 흩어지는 무지개도 그대로였다. 병실에서도 호스를 달고 탕뒤(발을 쭉 뻗어 중심을 유지하는 발레동작)를 하던 그다. 그는 오히려 더 바빠졌다. 국립발레단 강의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전남 목포시를 오간다. 광명문화재단, 용인문화재단 등 지역문화단체와 공연도 올린다. 무엇이 그를 여전히 무대에 서게 하는 걸까. 3월과 5월 용인 시민과 함께하는 공연 ‘쉘 위 발레’를 준비하고 있는 그를 서울 서초구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지금은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한 건가?
    체력적인 면에서는 100% 회복했다고 볼 순 없다. 대신 기술과 노하우가 늘었다. 지금도 매일 연습한다. 연습량은 어디 가지 않는다. 치료를 받을 때 병실에 누워서 생각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발레밖에 없더라. 발레 할 순간을 생각하면서 치료도 견뎠다. 식도암 수술 뒤에는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설 수 있게 된 후부터는 매일 탕뒤를 했다. 아내는 호스를 여러 개 달고 연습하는 걸 보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빨리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했다. 덕분에 호전돼서 퇴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발레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아직 나의 예술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완성을 향해 가고 싶은 열망이 열정을 만든다. 나는 남들보다 늦게 발레를 시작했다. 몸이 다 굳은 뒤였다. 발레 할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했다. 근육이 찢어지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운 적도 많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걸 찾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오래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앙대 무용학과 88학번으로 입학한 뒤 다음 해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 신문 1면에 났을 정도로 당시엔 화제였다고?
    대학 2학년 재학생이 큰 상을 받고 신문 1면에 기사가 나자 도대체 누구냐고 총장님이 찾아오셨다(웃음). 덕분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꿈꾸던 미국 뉴욕 발레 연수도 갔다. 유니버설발레단에 있을 때는 매일 자정까지 연습실에 남아 연습했다. 당시 문훈숙 단장님과 함께 러시아 키로프(현 마린스키)발레단 객원 주역으로 갔던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최초로 동양인이 무대에 올랐다고 하던데.
    1995년 6월 5일이다. 날짜도 기억한다. 당시 무대의 모습, 공기마저 생생하다. 발레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구나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다. 

 
이원국 발레리노는 다양한 지역문화단체와 함께 공연하며 ‘발레의 대중화’를 위해 뛰고 있다. (사진 이원국)



    마린스키발레단은 1738년 문을 연 러시아 황실발레단의 후신이다. 러시아 황실에서 운영하던 발레단과 극장은 러시아 문화의 정수를 담는다. 12명의 소년과 12명의 소녀로 시작한 이 발레단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발레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무용가들을 배출했다. 소수정예로 교육받은 러시아 무용수 중에도 극히 일부만 마린스키발레단으로 선발되기 때문에 동양인 발레리노가 무대에 선 건 이 씨가 최초였다.
마린스키 대표 무용수가 된 김기민 발레리노가 제자라고 들었다. 이원국발레단 출신 김유진 발레리나는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기민 발레리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그만둘지 말지 기로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왔다. 발레 하는 걸 보니 자질이 충분했다. “발레를 계속하면 좋겠다. 대성할 수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러시아는 클래식 발레가 태어난 곳인데 그곳에서 한국인이 정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무용수로서 부럽기도 했다. 김유진 발레리나는 이원국발레단의 최연소 단원이었다. 만 14세에 지젤로 데뷔했다. 이런 후배들에게 오히려 내가 많이 배운다. 스승으로 기억해주면 고마울 뿐이다. 사실 제자들 중에는 활동하다 은퇴한 경우도 있고 안타깝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그들이 더 마음에 남는다. 제자들에게 힘들 때 꼭 찾아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힘들 때 얼굴 보면서 살자. 같이 얘기하고 발레하자”고. 
이원국발레단을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04년에 만들었다. 발레를 대중화하고 발레의 저변을 확대하고 싶었다. 연간 150회 이상 공연을 목표로 했다. 관객 두 명 앞에서 공연한 적도 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웬만한 소극장이 문을 닫는 월요일에 극장을 대관해 ‘월요발레’를 했다. 발레를 더 많은 사람이 알고 즐기기를 바랐다. 소극장 상설발레공연으로 ‘이원국의 발레이야기’와 ‘사랑의 세레나데’를 4년 넘게 매주 월요일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진행했다.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공연이나 장애인을 찾아가는 공연, 청소년을 위한 해설발레도 진행했다. 2019년 이후 코로나19로 공연을 이어갈 수 없게 되고 식도암이 발병하면서 발레단은 휴지기에 들어갔다. 지금도 아쉬운 마음이다. 
당시 발레아카데미도 함께 운영했는데?
    러시아 등 다른 나라를 보면 전체적으로 발레 수준이 높다. 우리는 몇몇의 기량이 훌륭한 무용수가 세계적인 무대에 서고 있지만 평균적인 기량은 그렇지 못하다. 발레전문 교육기관이 드물고 대학의 전공발레 중심이어서다. ‘발레의 대중화’가 필요한 이유다.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클래식 발레는 1㎜의 오차도 없어야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있다. 기본기가 중요한 장르 중 하나가 발레다. 
최고령 발레리노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
    글쎄…. 최고령을 노린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불리더라(웃음). 그저 ‘어제도 발레를 했으니 오늘도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온 것 같다. 발레는 매일 새롭다. 하루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그 전날 했던 걸 할 수 없다. 30년 전 스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는 것도 있다. 어제 부족했던 걸 오늘 하게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나에게는 발레가 예술이기도 하지만 수련이기도 하다. 나는 제대로 발레교육을 받지 못하고 발레리노가 됐기 때문에 늘 배움에 목마름이 있다. 
환갑에도 무대에 선 이원국 발레리노를 볼 수 있겠다.
    예전에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했는데 벌써 57세가 됐다. 지금처럼 지내다 보면 60세에도 연습을 하고 무대에 서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때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환갑이라고 특별할 것 없는, 늘 해오던 무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쇼라스! 러시아어로 ‘한 번 더!’라는 뜻이다. 그가 연습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더는 못할 것 같을 때 ‘한 번 더!’, 그만하고 싶을 때 ‘한 번 더!’를 외치며 여기까지 왔다. 1967년생 발레리노는 지금도 무대를 보면 설렌다. 60세의 무대를 준비하는 그에게 종착점은 없다. 그는 계속 꿈꾼다. 더 많은 아이가 제대로 된 발레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아주 나이가 들어서도 발레 무대에 설 수 있기를. 발꿈치를 든 그의 모든 걸음은 그 꿈을 향한 ‘이쇼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