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4부

2024-10-02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4부
'다시 찾은 보물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3-4.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청주읍성의 중앙에 해당되는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약칭 충청병영)이 있었다. (중략)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랫동안 청녕각(淸寧閣)으로 오해되었다가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영문이었던 것으로 바로 잡혔다. 1976년에 ‘청녕각’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 처마에 ‘청녕각’이라 새긴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 편액이 여기에 걸려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충청병영 내의 2층 누각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략)
     그러면 그동안 청녕각으로 알려졌던 중앙공원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지도서』에 실린 「충청병영도」그림에 이 건물을 원문(轅門)이라 표기하였고, 본문 공해 조에는 폐문루(閉門樓)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이란 군진이나 병영의 정문을 뜻하는 일반 명사이고, 폐문루 역시 문루와 같은 의미이다. 또한, 구례 운조루에 소장된 「청주읍성도」에는 병영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위치에 명칭은 표기하지 않고 동향으로 자리한 문루를 그려 놓았는데 위치상으로 중앙공원에 현존하는 문루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1923년에 간행된 『청주연혁지』에도 실업은행지점(현 우리은행 청주지점)의 서쪽으로 관찰도(도청)의 정문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그곳에 웅대한 문루가 서있다고 하였다. 「청주읍성도」에 보이는 상황과 일치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사료들을 통해 이 건물의 용도는 병영의 정문에 세워진 문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충청도읍지』 등 여러 읍지에 정곡루(正鵠樓)가 병영에 있다고 소개되어 있어, 이 건물의 명칭이 정곡루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정곡’이란 과녁의 한 복판이 되는 점을 뜻하는 말로 흔히 정곡을 찌르다와 같이 목표나 핵심을 비유할 때 쓰이는데, 문루의 명칭으로 인용되어 편액에 새겨졌던 것이다.
      충청병영은 1402년(태종 2)에 처음 덕산에 설치되었고 1418년(태종 18)에 해미로 옮겼다가 1651년(효종 2)에 청주읍성 안으로 이전되었다. 병마절도사는 충청도 관찰사가 겸직하거나 따로 전임의 종2품 절도사를 두어 충청도의 육군인 기병과보병을 총괄하였다. 병영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2층 누각의 다락집이다. 아래층은 출입을 위한 통로로 3개의 문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도록 되어 있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아 수문병이 올라가 보초를 서거나 조망이나 감시를 하였다. 병영 내의 여러 시설 중에서 이 문루만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읍성 내의 남북을 관통하는 대로 즉 지금의 성안길에서 병영으로 진입할 때 정면으로 영문이 우러러 보이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의 병영문과 중앙공원


    처마는 서까래에 부연을 덧댄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였다. 특히 지붕 네모서리에 설치된 추녀 아래에는 알추녀라는 부재를 추가로 설치하여 처마가 더욱 날렵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공포형식은 이익공이며, 가구는 5량가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구조는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사다리꼴의 방형 고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남측 내부에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대는 우물마루로 되어있으며, 사면에는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영문의 상층구조는 가구의 짜임이나 부재의 치목, 세부장식 등에서 고급스런 건축기법들이 나타나고 있어 관영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병영문은 조선시대 병영 문루의 형식을 잘 갖추고 있는 전국에서도 흔하지 않은 건축물로서 충청도병마절도사 본영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만,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이곳에서도 군대 해산이라는 쓰라린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나라 지키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병사들은 쫓기듯이 이 영문을 나가 의병에 가담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낭인으로 살지 않았을까 짐작될 뿐 이들에 대한 기록은 없다.
    2014년에 이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을 전면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때 마룻대에 밀봉한 상량문의 전문을 여기에 실어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正鵠樓 重修 上樑文
    역사 깊은 맑은 고을 淸州 그 중심에는 淸州邑城이 있고 읍성의 중심에는 忠淸道兵馬節度使營이 있었으니 正鵠樓는 忠淸兵營을 출입하던 正門의 門樓이다. 청주읍성은 축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의 上黨縣을 시작으로 신라의 西原小京 고려 조선의 淸州牧과 오늘날 인구 85만의 淸州市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대를 아울러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 경제 군사의 중심이었다.     읍성은 둘레가 1.8㎞이고 남쪽의 淸南門 북쪽의 玄武門 동쪽의 闢寅門 서쪽의 淸秋門 등 4대문이 있었고 남문과 북문에는 甕城을 갖추고 있었다. 성안에는 남문북문을 연결하는 大路 즉 지금의 성안길이 있고 도로 서편에는 官衙 兵營 司倉 등의 주요시설이 위치하고, 동편에는 주택과 牢獄이 있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충남 海美縣에 있던 것을 1651년(효종 2)에 이곳으로 옮겨와 1907년 일제에 의해 조선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충청지역의 군사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이 병영문도 1651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루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輿地圖書에 閉門樓로 기록되고 同書 忠淸兵營圖에는 轅門으로 표기되어 병영의 정문임을 밝히고 있으며 명칭은 湖西邑誌와 淸州邑誌에 正鵠樓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淸寧閣 편액을 이 건물에 옮겨달아 1988년까지 50여년이나 황당하게도 관아에 딸린 누정으로 誤認되고 있었는데 朴相佾의 고증으로 병영문루로 확인되어 건물의 성격과 지정문화재 명칭이 바로잡혔다. 건물구조는 조선시대 營門의 일반형인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木造瓦家로서 누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鷄子欄干을 둘렀다. 일제강점초기에 청주읍성은 파훼되었고 충청병영은 1908년부터 충북도청으로 이용되었으나 1937년 도청을 신축이전한 후 많은 건물들이 헐리어 없어지고 이 문루만이 외롭게 옛터를 지키고 있다. 하늘을 날 듯 날렵하고 장쾌한 高閣도 세월의 풍상은 막을 수 없어 1955년에 보수한데 이어 1984년에 지붕해체보수와 마루일부보수 및 단청을 하였다. 다시 30년이 흐른 금년에 화강암주초석이 심히 부식되어 해체보수를 하니 盤石 위에 우뚝 서서 淸州歷史의 正鵠을 굳건히 지키며 소통하는 大門으로 영원하리라.    2014년 10월 13일 충북문화재위원 朴相佾 짓고 雲谷 金東淵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