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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_ 청주 공북루에 오르다 2부

2025-07-03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시 찾은 보물]
공민왕_ 청주 공북루에 오르다 2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역사인물'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2권: 역사인물’을 게재합니다. 
Cheapter4-2. 청주 공북루에 오르다 2부
   [공북루에서 친원 선포식을 갖다]
   정세운 장군이 개경에서 대승을 거뒀다고는 하나, 서북면에서 홍건적의 재침 보고가 올라왔다. 원나라는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기철奇轍형제 살해에 강력 반발했다. 곧이어 원나라에서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새로 임명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로부터 목화씨를 갖고 온 것도 덕흥군 사건과 관련이 있다. 문익점은 덕흥군 편에 섰다가 귀국하자마자 파직, 고향 경남 산청에서 갖고 온 목화씨를 재배하게 된다.

 



   공민왕은 정책전환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꼈고, 그해 8월 청주읍성 공북루에서 일시적인 친원정책 선포식을 가졌다. 이날 공북루 누대에 오른 25명의 고려 임시정부 대신들은 공민왕의 명에 의해 응제시를 지었다. 공북루에는 권한공權漢功이 지은 오언절구 한시가 걸려 있었고, 대신들은 그 한시를 차운次韻*해 같은 형식의 시를 지었다. 개경에 남아 있는 백문보白文寶는 “그 역사적 현장에 나만 빠질 수 없다”며 추가로 한시를 보내왔다. 조선 중종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까지 공북루에 시판詩板에 걸려있던 27수(권한공+25명 대신+백문보 한시)의 한시가 고스란히 수록돼 있다.
   *차운: 다른 사람의 시에 화답하면서 운자(韻字)를 같게 짓는 시.

 
노국공주(왼쪽)와 공민왕(오른쪽) 초상. 홍건적 침입 당시 노국공주는 생존해 있었다.
그녀도 청주읍성을 찾았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이날 대신들이 공북루에서 지은 한시는 대략 △공민왕의 덕화 칭송 △고려 중흥의 다짐 △환도의 소회 △응제시 참여의 영광 △청주 승경 예찬 등의 내용을 담았다. 공북루는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한시 「공북루전봉설 재청주拱北樓前逢雪在淸州」에서 ‘성은 외롭고 먼 곳의 나무에는 연기가 가로 걸렸는데, 들은 넓고 높은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춤추며 내리네城孤遠樹?烟氣野闊長空舞雪花’라고 노래할 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북문로 일대에 존재했다.
   시는 그의 문집인 『두타초』에 실려 있다. 청주 공북루는 공민왕 시기의 고려 임시수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복원 필요성이 있다. 
‘마의 삼각구도’와 한반도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국가는 기원 전부터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주로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했다. 역사 전문가들은 이를 ‘마의 삼각구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론의 핵심은 중국 대륙 남쪽이나 북쪽에 강력한 왕조가 출현할 경우 한반도에 국제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남쪽과 북쪽의 경계는 만리장성이다.
   남쪽은 중화中華로 별칭되는 한족漢族, 북쪽은 여진·거란·몽골 등 북방 민족이 자리잡고 국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주 충돌했다. 여기에 한반도 국가가 자의 또는 타의에 말려드는 국제 관계가 만들어지면 동북아에 ‘마의 삼각 구도’가 형성됐다. 
   역사적으로 남쪽의 한족 국가는 북쪽 국가와 한반도 국가가 동맹을 맺을 기미가 보이면 선제적으로 공격했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고조선 공격,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청주읍성 북문터 표지석. 성안길 북쪽 입구 근처에 위치한다



   만리장성 이북의 북방민족은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은 따듯한 쪽을 늘 호시탐탐했다. 추운 겨울이 돌아오면 식량 사정이 악화됐고, 그래서 가을 무렵에 만리장성 남쪽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사성어 ‘천고마비天高馬肥’가 생겨난 배경이다.
   북방 민족은 양자강 일대의 남쪽을 공격하기 전에 한반도를 다독여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한반도와 한족 국가가 연대하는 것도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거란족의 고려 침입, 여진족(청나라)의 조선 침략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려시대 몽골, 홍건적의 침입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몽골은 세계 정복의 일환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한족인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한 것은 대륙에서의 한족과 몽골족 간의 내전이 한반도로 불똥이 튄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