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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중_청주 ‘문의박씨’ 시조가 되다 1부

2025-07-10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시 찾은 보물]
박의중_청주 ‘문의박씨’ 시조가 되다 1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역사인물'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2권: 역사인물’을 게재합니다. 
Cheapter5-1. 청주 ‘문의박씨’ 시조가 되다 1부
   고려 공민왕은 수도 개경으로 환궁이 늦어지자 1362년 임시수도인 청주읍성에서 ‘임인 문과방목’이라는 과거를 실시했다. 이때 장원 급제한 인물이 박의중朴宜中(1337~1403)으로, 당시 청주읍성 취경루(현 중앙공원 망선루)에 방이 붙었다. 당시 26세였다.
   『고려사』권73에 ‘11년 10월 우시중 홍언박洪彦博이 지공거, 지도첨의 유숙柳淑이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박실朴實등 33명에게 급제를 내려주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동지공거: 고려시대 과거시험 부감독관을 말한다. 감독관은 지공거.

 
『고려사』는 박의중이 수석 합격을 했다는 의미로 ‘박실 등 33인 급제’라고 기록했다. 박실은 박의중의 어릴적 이름이다.



   박실은 박의중의 어릴적 이름인 초명이다. 박의중이 장원 급제를 하자 당시 동지공거였던 유숙이 ‘장원한 문생 박의중에게 주며次韻贈朴宜中壯元門生’라는 제목의 시를 내리고 축하했다.
   ‘왕업이 중흥하여 동한 유씨 같은데 / 나라 정사 다스릴 이 이윤과 주공 있어라 /…/ 그대 나이 젊고 재명이 성하니 / 한가한 사람들처럼 물외物外에 놀지마소’
<『동문선』>
   시어 중 ‘물외’는 속세 바깥, 즉 안빈낙도하는 삶을 말한다. 동지공거 유숙은 일찌기 박의중의 출중함을 알아보고 나라의 동량이 돼줄 것을 당부했다.

 
[그림: 강호생]


 
이성계의 5불가론
   14세기 중반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동북 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명나라가 대륙의 새로운 패권자가 됐고, 원나라는 초원으로 물러났다. 명나라는 원나라가 설치했던 쌍성총관부 지역(함경도 일대)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며 고려에 반환을 요구했다.

 
박의중의 수석 합격을 알렸던 방은 당시 취경루(현 중앙공원 망선루)에 붙었다. 드론촬영.



   1356년(공민왕 5) 고려 공민왕은 이 지역을 탈환하고 화주和州를 설치하고 영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명나라가 대륙의 새로운 패권자가 됐다고 하나 요동 일대는 명의 통치력이 완전하게 미치지 않고 있었다.
   1388년 고려 우왕은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삼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그 유명한 이성계의 4불가론이 등장한다.
   이성계는 ①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②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③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④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며 요동 공격을 반대했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거론했지만 외교적인 내용까지 포함하면 ‘5불가론’이 존재했다. 『태조실록』1권 총서는 ‘지금 철령위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제학 박의중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 중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는 지금 철령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박의중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명태조 주원장朱元璋답변을 듣지 않고 요동 정벌에 나서는 것은 나라와 백성에 모두 안 좋다는 의미다.
   *표문: 근대 이전 시기의 외교문서.
3단계 논리로 명태조를 설득하다
   명나라 황궁에 들어간 박의중은 ①~③의 3단계 논리로 명태조를 설득했다.
   ① “조종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데에 구역이 정해져 있으니,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고려사』권37>
   ② 지정至正16년(1356) 사이에 원元조정에 아뢰어, 윗 항의 총관과 천호 등의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을 다시 본국에 속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여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고려사』권37>
   ③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고, 두터운 덕으로 어루만져 주셔서, 몇 개 주의 땅을 하국下國의 땅으로 삼아 주십시오. 신은 삼가 더욱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신 은혜[再造之恩]에 감읍하며 만수무강을 항상 축원하겠습니다.“
<『고려사』권37>

명나라는 원나라가 설치했던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다. 출처: 네이버 포토(부분 수정)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