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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소설] 저체온증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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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소설] 저체온증
'글. 박순철'

    탤런트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유 팀장! 
    두뇌까지 명석해 30:1인 입사시험에서 남자들을 제치고 수석을 했다. 몸 어딘가에 암기 박사가 들어있는 게 분명하다고 수군거릴 정도로 그의 기억력은  대단하다. 우리 영업부에서는 서류 찾기가 귀찮으면 유 팀장에게 물어보면 장부를 보지 않고도 척척이다. 금년도 우리 회사 예산총액, 지난달 외국으로 선적한 물품대금 등을 훤히 꿰고 있는 그다. 그렇기에 입사 동기들인 남자들도 아직 올라가지 못한 팀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런 그녀에게도 단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노처녀 라는 사실, 올해를 넘기면 처녀 나이 환갑에 가까운 서른다섯 살이다. 외국 담당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김 과장이 유 팀장에게 구혼의 화살을 쏘았다가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고, 그 밖에 몇몇 사우(社友)들도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나가떨어졌다는 풍문도 떠돌았다. 
    내가 영업부로 전입해 오던 날, 유 팀장은 나에게 손수 커피를 타 주었다. 
    "허 대리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 들어왔어" 
    "그러게 말이야 그 도도하던 유 팀장도 이젠 마음을 돌이킨 모양이야. 잘 해보라고. 그런 수재와 결혼하면 노벨상을 탈 만한 후손도 얻을 수 있을 거야" 
    "아주 잘 어울리는 동갑내기 노총각 노처녀야"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유 팀장에게 이끌려가는 나 자신을 어쩌지 못했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냉정한 유 팀장이 나에게는 따뜻하게 대해주었지만, 입사동기생에게 결재를 받는다는 일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와 나를 두고 자질구레 나돌고 있는 소문을 유 팀장도 모를 리 없겠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소문처럼 유 팀장과 내가 장래를 약속하거나 은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기를 은근히 희망하는 나였고 노총각을 면해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날은 비도 오고 기분도 울적해서 결재서류에 저녁에 만나자는 내용을 쓴 쪽지를 끼워서 올렸더니 그 내용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OK'하고 쪽지에 사인해준다. 그날 저녁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고 볼링을 한 게임 치고 밖으로 나오자 10월의 밤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허 대리! 미안해. 입사 동기이면서 내가 상관이어서 몹시 불편하지. 우리 오늘처럼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는 친구같이 지내자. '야' ‘자'하면서……." 
    유 팀장이 나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지금까지 사무실에서의 차고 쌀쌀맞던 상사(上司) 유 팀장이 아닌, 다정한 연인 같았다.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법도 하지만 유 팀장은 일체 그런 말을 흘리지 않는 용의주도한 여자였다. 나를 버리고 미국으로 날아간 첫사랑 숙이와의 애절했던 이야길 들으면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던 인정이 없는 듯한 여자! 누구를 사랑했던 경험이 있느냐고 물어도 빙그레 미소 짓는 것으로 대신하는 조금은 목석같은 여자! 
     '유 팀장을 어떻게든지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사랑한다는 말을 언제쯤 할까, 그 시기는 언제가 좋을까?' 
    한번은 같이 술을 먹고 '지숙 씨 사랑해' 하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대답은 뜻밖에 간단했다. '요즈음 사랑한다는 말 너무 흔하잖아. 아무에게나 하더라고, 그런 부류의 사랑이지?' 하며 피식피식 웃는 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진정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 방법도 평범하게 저녁이나 먹고 술기운을 빌려서 하는 게 아니라 감동먹고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기발한 방법을 떠올리려 몇 날 며칠을 고심했으나 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11월의 어느 날 일본계 회사와 계약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바이어가 갑자기 좀 더 알아보고 계약에 임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실무자인 유 팀장의 기분이 착 가라앉아있었다. 
     "오늘 기분도 그렇고 한데 어디 가서 간단하게?" 
    하고 문자를 날렸더니 이내 답이 왔다. 
     "좋아, 하지만 오늘은 내가 쏜다." 
    우리는 술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가서 질펀하게 노래를 부르고, 답답한 가슴을 풀기위해 한강변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가 오색영롱한 빛을 발하고, 아파트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한강에 어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허 대리! 오늘 내 기분 풀어줘서 고마워." 
     "고맙긴, 하지만 생각해본다고 했으니까 아직 희망이 있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어려울 거야. 우리하고 계약 안 한 거 후회할 거야. 그때 다시 찾아오면 가격을 왕창 올려버려야지 호 호 호" 
    유 팀장이 상당히 취했는지 자꾸만 내 몸에 기대왔다. 나는 유 팀장의 손을 잡았다. 





     "왜 이리 춥지?" 
    유 팀장이 한기를 느끼는 듯 오들오들 떠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입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어서 유 팀장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다.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기라도 한 듯 유 팀장은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나를 받아들이겠다는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저항의 몸짓이 아니라 뺨을 때리고도 남았을 유 팀장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사랑을 고백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뜸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양손으로 유 팀장을 당겨서 정면으로 끌어안았다. 
     "지숙 씨!" 
     "가만, 아무 말도 말고 좀 더 따뜻하게 안아줘"
    유 팀장이 말을 자르더니 내 가슴으로 더 안겨왔다. 
    분위기를 잡아야 했다. 유 팀장도 이젠 내 뜻을 알고 가슴에 안겨 온 것이 분명했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세상을 모두 얻은 듯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유 팀장이 내 팔을 물리고 겸연쩍은 듯 얼굴을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 이제 추위가 조금 풀렸다. 허 대리 어서 가자?" 
    기왕지사 뽑은 칼, 어찌 다시 꼽으랴! 
    "지숙 씨 나와 결혼해줘. 평생 여왕처럼 떠받들게." 
    "뭐! 결혼? 내가 허 대리 가슴에 안긴 것은 추위를 녹이려 한 것뿐이야. 몰랐나 본데 나는 저체온증이 심하거든. 나처럼 독신주의를 꿈꾸고 있는 줄 알고 친구 하자고 했더니 그 말을 오해하고 있었군그래. 남자들은 똑같은 속물이야. 쳇" 
    말을 마친 유 팀장은 작살 맞은 뱀장어처럼 도로를 향해 내달렸다. 지금껏 알딸딸하던 술기운이 일시에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