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고구마가 웃었다
'글. 최명임'

서툰 농부의 밭에도 무리 없이 가을이 왔다. 고구마밭 흙살을 헤집고 호미가 요동칠 때마다 결실이 고랑에 쌓여간다. 막 탯줄을 자르고 나온 붉은 핏덩이를 붙들고 안사람이 웃는다. 밭고랑에 지폐가 널린다.
캐는 수고를 생각하니 나누 먹기 거북하다. 비만한 남편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고 나는 아예 퍼질러 앉아 씨름한다. 서방님은 줄기를 걷느라 진땀 빼고 백수를 앞둔 어머니 굽은 허리가 신음하고 있다.





고구마 한 상자에 들어있는 수고의 양을 먹는 사람은 알까. 문득 손자 녀석이 밥상머리에서 올리던 감사기도가 떠오른다. 유치원 아이도 하는 감사기도를 나는 언제 해보았는지 생각해 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이 진을 다 빼고 흙투성이가 된 장갑을 벗으며 주저앉는다. 등에도 얼굴에도 소금꽃이 핀다. 이 고생 안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을 해 보자고 한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망조 든 인생 많지요. 논담을 좀 해 볼까요?” 하고 웃으며 바짝 다가앉는다. 90kg 거구가 허허허 웃는다.
절로 피는 들꽃이라 했는가. 거저 얻는 것은 없으니 굳이 그 속내 파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돌 틈을 파고들다 생긴 상흔이며 굴곡진 뿌리, 해충에 쏘인 생채기가 벌겋게 부어오르기 한두 번이었을까. 또한 들꽃의 가을을 위해 보내온 햇볕과 바람과 비의 진정은 어쩌라고.
고구마 같이 편할라 하고 심었는데….
수고 없이 무얼 얻을 수 있을까. 첫해는 고추를 심어 얼추 200근은 땄다. 고추 따느라 다들 몸살을 앓았다. 형제들의 김장 고추와 고추장 거리와 일 년 양념으로 푸짐했다. 그 다음 해는 힘든 고추 농사 줄이고 고구마를 심어 두루 나누어 먹었다. 뜻밖의 장사로 수입까지 있어 어머니 용돈으로 드렸다.





지난해는 그 돈맛에 욕심 부리다가 그만 낭패를 보았다. 고구마는 풍작이었다. 조금 더 키우려고 늦게 캔 것이 화근이 되어 모조리 썩어버렸다. 다디단 것이 썩으니 쓴 듯 단 듯 변절자의 냄새같이 역겨웠다. 생계를 위한 농사였으면 우리 집 경제가 휘청거릴 뻔했다.
올해도 흙살 좋은 골에서 살진 고구마가 눈이 뻐근하도록 나온다. 돈이라 생각하니 사랑스럽다 어인 일인지 옆 고랑으로 갈수록 겨우 한두 알 품었거나 뿌리만 간신히 내린 것도 있다. 돌덩이 같은 흙살 탓인가. 나눠 먹자던 초심이 변하니 가을이 동티를 낸 것일까. 속이 무척 상했다.
남편이 한 고랑 건너 계시는 어머니 들으실라, 낮은 소리로
“욕심 버리고 고마운 이들과 나누어 먹자. 어머니께는 잘 팔았다고 말씀드리고 용돈 드리면 되지.” 한다. “거짓말을? 그려, 하얀 거짓말.” 가슴에서 무언가 훅 빠져나갔다. 웃음이 터지는데 사방에서 고구마가 따라 웃는다. 사래도 긴 밭에 널브러졌던 욕심이 사라졌다.
고구마가 한 박스 두 박스 주인을 찾아간 뒤에 아들은 후덕한 손으로 어머니께 용돈을 드렸다. 고구마를 나눈 것이 무슨 대수라고 창고를 비우고 나니 마음이 뿌듯하다.





따스함이 그리운 계절이다. 네 살 손자 녀석이 여름내 해님이 밉다고 그늘만 찾더니 요즘은 그늘이 밉다고 해님 어깨에 기댄다. 한뎃잠 자는 이들 푹신한 이불이 그립겠다.
구세군의 냄비가 달구어지는 계절이 오면 세간에 화제가 되는 인물이 있다. 이름을 감추고 소중한 것을 내놓는 그 사람, 그 대가로 얻은 행복한 전율 알만하다. 그깟 고구마나 소액의 기부로 얻는 내 소소한 즐거움과 비교하랴. 그는 나와는 다른 차원 높은 행복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 극염도 모자라 겨울 혹한을 예고한다. 온기를 나누면 혹한도 녹아내릴 테니 이왕이면 나도 큰 무엇을 내놓고 싶다. 없는 것이 죄인지, 욕심이 죄인지….
세상의 작고 큰 손들이 마음을 내는 바람에 겨울이 추울지라도 마음은 한결 훈훈하지 않던가. 마음을 내면 고구마도 웃는데 우리 빈손이면 어떤가, 몸으로도 온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것을. 올 겨울 혹한도 무리 없이 잘 지나갈 것 같다. 고구마 한소쿠리 쪄서 이웃 불러야겠다. 호호 불어가며 먹다보면 정도 돈독해질 테니.

EDITOR 편집팀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우리 숲 이야기 공모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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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니어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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