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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주간지 K-공감
40년 ‘주경야교’ 참스승 “80대 학생의 호박죽 가장 값진 스승의 날 선물”
'수원제일평생학교 박영도 교장'

우리 집 마당에 오래된 늙은 살구나무가 있다/ 봄이 되면 상큼한 살구가 주렁주렁 열린다/ 우리 학교에 오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글을 배우고 쓰니/ 글자가 주렁주렁 열린다.
처음 받아쓰기는 선생님 불러주는 대로 썼는데 틀렸다고 하신다/ 받침 하나가 아니고 두 개라고 한다/ 나는 지금 받침 두 개가 있는 글자를 불러주는 대로 쓴다/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김○○님 백점이에요/ 나의 하루가 백점으로 마무리되었다.
수원제일평생학교(경기 수원시 인계동)에는 학생들이 직접 지은 시가 곳곳에 걸려 있다. 삐뚤빼뚤 서툰 글씨를 꾹꾹 눌러 쓴 시는 늦은 나이에 한글을 깨친 기쁨과 희열로 가득하다. 평균 나이 75세. 허리는 굽고 관절은 성치 않아도 배움에 대한 열정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간직한 주름진 얼굴들이 뒤늦게 칠판 앞에 모여 ‘가나다’를 노래한다. 교실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모르는 게 많아 답답해 죽겄어”라면서도 “하나씩 알아가는 게 재미진다”며 활짝 웃었다.
수원제일평생학교는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비영리 민간 교육기관이다. 1963년 설립된 이래 정규교육을 제때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제2의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재야 사회교육기관으로 구실해왔다. 61년간 배출한 졸업생만 6000여 명. 과거 인근 섬유회사 여공, 버스 안내양, 구두닦이 소년들이 주경야독을 하던 곳이 이제는 어린 시절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한 70~80대 어르신들을 위한 문해교육의 장으로 바뀌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년, 다문화가정의 이주여성과 자녀, 학교 밖 청소년 등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된 이들도 찾아온다. 배움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라도 무상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박영도 교장은 30년 가까이 수원제일평생학교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1980년대부터 야학교사로 활동한 그는 ‘야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내내 야학교사로 활동했고 졸업 후 의약업에 종사하면서도 평생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러 오는 이들을 위해 퇴근 후 기차를 타고 학교로 달려가 새벽까지 분필을 잡았다.

1963년 설립된 수원제일평생학교는 정규교육에서 소외된 어르신 등에게 한글, 수학, 컴퓨터 등을 교육한다. (사진. C영상미디어)



수원제일평생학교에 처음 온 것은 1994년이다. 이듬해 불이 나 학교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도 성당 지하 교리실을 빌려 수업을 이어갔고 다시 학교를 일으켜 세웠다. 이후 어려움이 겹쳐 교사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상황에서도 그만은 학교를 지켰다. 교장이 된 건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였다. 2017년 평생교육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평생교육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박 교장은 60대인 지금도 여전히 교단에 오른다. 배우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 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학교에 오는 것이 재미있다는 그는 이를 두고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대학시절 내내 야학교사로 활동했다고요.
제가 78학번인데 1980년대는 야학이 대학생의 전유물이었어요. 야학교사 하겠다는 이가 워낙 많아 학생보다 교사가 많을 정도였어요. 대학끼리 연합해 야학을 만드는 등 다들 열정이 넘쳤어요. 낭만이 있었죠. 배우러 오는 이들은 대부분 청소년들이었어요. 집이 가난해 학교에 못 가고 공장 다니고 식모살이 하던 애들을 데려와 공부를 시켰어요. 그때 가르친 학생 중 하나가 서울대 치과대학에 들어가서 나중에 제 금니도 해줬어요(웃음).
생업활동을 하면서도 계속 야학교사로 활동하셨죠. 사명감이었나요?
대학원 석사 과정 중 취업이 됐는데 제가 담임으로 맡은 학생들을 그냥 놔둘 수 없었어요. 기차를 타고 수원에서 대구를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쳤죠. 이후 몇 차례 직장을 옮겼는데 그때마다 어떻게든 야학과 인연이 닿았어요. 수업을 마치고 오면 새벽 1시가 넘었죠. 2010년까지 생업과 수업을 병행했어요.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죠. 내가 가진 것을 나눠 누군가의 삶이 달라진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순수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저 역시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제 힘으로 일어서야 했는데 그 유일한 수단이 공부였어요. 어릴 땐 교사가 꿈이었는데 공부를 잘하니 주변에서 의사가 될 거란 기대가 컸어요. 그런데 의대 시험에 떨어지고는 충격이 컸죠. 생물학 전공으로 대학에 간 뒤에 방황을 좀 했는데 그때 야학을 접한 탓에 가르치는 일이 제 인생에 깊숙이 들어오지 않았나 싶어요.
수원평생제일학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교장을 맡았습니다.
1994년 평교사로 온 지 8개월 만에 학교에 불이 났어요. 학교에 가니 책상이며 생활기록부며 전부 타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더군요. 처음엔 성당 지하 교리실을 빌려 수업했는데 거기서도 쫓겨난 뒤엔 정말 갈 데가 없었어요. 졸업생들과 교사들이 십시일반 갹출하고 일일찻집을 해서 모은 돈 500만 원을 보증금으로 교회 건물 한 층에 학교를 세웠어요. 이후에도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죠. 누군가 중추적인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당시 교장 선생님이 병환에 걸려 나이가 제일 많은 제가 교장을 맡았어요.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었으니까요. 급할 땐 보너스 탄 걸 아내 모르게 학교에 보태기도 했고요(웃음). 그때 남아 있던 학생이 8명이었는데 지금은 250명이나 되니 꽤 성장했죠.
지금은 누가 무엇을 배웁니까?
야학의 개념이 예전에는 ‘밤 야(夜)’ 자의 뜻으로 썼다면 지금은 ‘들 야(野)’ 자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과거 근로청소년들이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개념에서 이제는 어르신이나 소외계층의 비정규교육을 뜻하는 말이 됐어요. 학생은 90% 이상이 성인 학습자로 80대 여성이 가장 많아요. 이분들이 태어나고 자란 시기에는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무척 적었어요. 온 국민이 가난한 시절에 자식은 여덟, 아홉씩 낳았으니 딸들이 공부하는 건 꿈도 못 꿨죠. 그분들이 이제라도 한글을 배우겠다고 오는 겁니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문해교육이 중심이에요. 수학, 영어도 가르치고 컴퓨터와 스마트폰 사용법도 알려드려요. 그렇다고 구구단 같은 걸 억지로 외우게 하진 않습니다. 배움은 늘 즐거워야 하니까요. 공부는 시험을 치르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내 삶의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하는 겁니다.
80대에도 배움에 열정이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어르신들은 정말 간절해요. 모르는 사람들은 그 연세에 공부해서 뭣하겠냐고 하지만 당사자는 배우지 못한 게 평생 한으로 남아 있어요. 뉴스를 봐도 자막을 못 읽고 학식이 짧으니 가족 간의 대화에도 못 껴요. 나중엔 ‘엄마는 몰라도 돼’라는 식이 되는 거죠. 입학 상담을 하러 오는 분들은 똑같이 말해요. ‘죽기 전에 제 이름은 쓸 줄 알면 좋겠어요’, ‘손주하고 카톡 하고 싶어요’라고요. 이곳에 오면 정말로 열심히들 합니다. 매년 어르신들이 쓴 시를 엮어 시화집도 냅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습니까?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학습자들의 인생사를 알게 돼요. 그렇게 삶을 공유한 분들은 10년, 20년 만에 전화가 와도 얼굴이 기억나요. 여기서 저와 8년간 공부한 80대 어르신은 며칠 전엔 자기 재산을 전부 학교에 내놓겠다고 하더군요. 그분의 삶은 그야말로 인간극장이에요. 나이 열셋에 식모살이를 하다 열여섯에 결혼한 뒤 자식을 넷이나 낳았지만 가족과 모두 인연이 끊겨 혼자 외롭게 살아오셨어요. 가족에게 연락해도 만나겠다는 이가 없답니다. 여기서 뒤늦게 한글을 배우면서 지금은 편지도 곧잘 쓰세요. 건강이 악화돼 최근에는 학교에도 잘 못 나오시는데 스승의 날이라고 호박죽을 끓여 오신다고 하더군요. 제 인생의 가장 값진 선물이에요.
교사들은 봉급을 받지 않는 걸로 압니다.
은퇴했거나 경력이 단절된 학교 교사, 방과후 교사, 다문화 교사 등 50여 명이 계세요. 국비지원사업이나 지방자치단체 프로그램 등을 진행할 경우엔 강사비 명목으로 보수를 지급하기도 하지만 그 외엔 거의 봉사활동 차원에서 하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학습자들에게 100% 무상교육을 제공하다 보니 선생님들에게도 드릴 것이 없죠. 채용 전 보수를 못 드린다고 말씀드려도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인을 데려와 함께 활동하기도 하고요. 보수 없이도 일할 수 있는 건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배움과 가르침의 가치를 아는 거죠.
학교 운영비 중 상당수를 사비로 메워오셨다고요.
시에서 받는 지원금, 졸업자들 기부금, 대외사업비 등으로 충당해도 매년 운영비는 부족해요. 회사에 다닐 때나 이후 벤처회사를 설립했을 땐 제 수입이 있으니 어떻게든 자금을 융통해 고비를 넘겼어요. 하지만 이후엔 임대료가 몇 달 치나 밀려 당장 건물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도 여러 번 처했죠. 신기하게도 정말 감당할 수 없이 힘들 때마다 어디선가 큰 상을 주셔서 위기를 넘겼어요. 올해 1월엔 포스코청암상(교육상)을 받아 상금으로 그간 쌓인 부채를 갚을 수 있게 됐습니다. 계속 많은 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드릴 수 있게 돼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이곳에 온 지 30년째입니다. 앞으로 꿈꾸는 학교의 모습이 있나요?
여기서 만난 이들은 모두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그들과 배움의 공동체를 넘어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교사든 학생이든 지역사회에서는 다 같은 시민이잖아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이 3층짜리 주택인데 방 세 개를 세를 주지 않고 비워놨어요. 학습자 중 독거노인 등 오갈 곳 없는 분들이 언제든 사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인 방법을 계속 고민 중입니다.
우리 학교의 캐치프레이즈는 ‘100년의 아름다운 도전’이에요. 지난해 개교 60주년을 맞았는데 100주년까지 교육의 가치를 이어가는 게 목표예요. 아무리 잘사는 나라라도 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소외계층은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교육도 마찬가지죠. 그 부분에서 우리 같은 민간기관이 꼭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봐요. 우리의 날갯짓 하나로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계속해야 하지 않겠어요?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두고 만난 박 교장은 학생들이 가져온 것이라며 취재진에게 여러 종류의 떡을 건넸다. “고령 학습자들이 많다 보니 스승의 날엔 이처럼 먹을 것을 가져오는 일이 많다”고 했다. 음식은 그 자리에서 풀어 다 함께 먹어 치우는 것이 원칙이다. 나만 잘 봐달라고 주는 뇌물이 아니기에 제자들의 따듯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아무 대가 없이 만난 이곳의 선생과 제자들은 그렇게 벽에 걸린 교훈처럼 오늘도 ‘더불어 배우고 함께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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