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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 소방관 아들 기리며 5억 기부한 아버지 김경수 씨
'자랑스러운 부모 되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꿈에서라도 보고싶은데…'

“내가 이렇게 뉴스에 나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떠난 내 아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한 일인데….”
1998년 10월 1일 폭우가 쏟아지던 날, 대구 금호강에서 여중생 세 명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스물여섯 살 2년 차 소방관 김기범 소방교는 실종자 수색에 나갔다. 그 길로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결혼식을 세 달 앞둔 예비신랑이었다. 26년이 지난 올해 3월 12일, 김 소방교의 아버지 김경수(83) 씨는 순직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평생 모은 5억 원을 소방가족희망나눔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김 씨의 기금으로 만들어진 ‘소방영웅 김기범 장학기금’은 순직 소방공무원 자녀와 군위군대한전몰군경유족회 후손들에게 매년 수여될 예정이다.

김경수 씨가 아들의 흔적이 담긴 사진 앨범을 내보이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5억 원은 김 씨가 70년 가까이 사과 농사를 지으며 차곡차곡 모은 돈이다. 그는 낮에는 절대 전등을 켜지 않고 커피는 무조건 봉지 커피를 타 마신다. 하루에 한 갑씩 피우던 담배도 아껴 한 갑으로 사흘을 피운다. 옷도 단벌이다. 장학금 기탁 행사 참석을 위해 옷 한 벌 사는 것이 어떠냐는 주변 권유엔 “그런 데 돈 써서 뭣하느냐”고 했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나중에 우리 아들 만났을 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고 싶었거든요. 이 세상에 없는 아들을 그리워만 하면 뭣하겠습니까? 딴생각 안 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모아야겠단 마음이었어요.”
김 소방교는 김 씨가 늦은 나이에 얻은 외동아들이었다. 다 커서도 아버지와 살을 맞대며 애교를 부리는 살가운 아들이었다. 용돈이 생기면 모아놨다가 어머니에게 되돌려주곤 했다.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지원했을 정도로 근성도 남달랐다. 소방관이 되겠다는 의지 역시 확고했다. “소방관은 너무 위험한 직업이니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부모의 반대에도 꺾이지 않았다. 사고 당일 김 소방교가 수색 작업을 취재하던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보도 영상이 남아 있다. 영상 속 그는 “(강) 중간에 걸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 같고요. 끝까지 내려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소방가족희망나눔이 김경수 씨에게 수여한 감사패. (사진. C영상미디어)



5억 원이라는 큰돈을 기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큰돈은 무슨 큰돈입니까. 일찌감치 마음먹었던 일입니다. 이렇게 아들 이름으로 장학금이 마련됐으니 더 바랄 게 없어요. 아쉬움 하나 없이 후련합니다.
부인도 같은 마음이었나요?
안식구가 3년 전에 떠났는데요. 기부 계획은 그 전부터 같이 얘기했어요. 참 훌륭하고 인자한 사람이에요. 매일같이 아들을 그리워하느라 마음에 병이 생겨서 먼저 가버린 것 같아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선 “기범아, 기범아”하면서 힘들어했어요. 그러면서도 제가 걱정할까봐 제 앞에선 울지를 않았어요. 아들이 묻힌 곳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그 앞에서 참 많이 울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김기범 소방교는 어떤 아들이었나요?
참 착했죠. 부모 말이라면 거스르질 않았어요. 게다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잘난 아들 뒀다고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어요(웃음). 안사람이 애를 업고 남춘천역 시장에 호박을 팔러 다닌 적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잘생긴 놈 데리고 나가면 납치당할 수 있다. 장사하지 말라”고 뜯어말렸어요.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소방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 어땠나요?
많이 말렸지요. 위험하다, 절대로 하지 마라. 저는 아들이 교육자가 됐으면 했어요. 제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국민학교를 겨우 마쳤어요. 바로 과수원 소작농으로 일하면서 평생 고단하게 살았던 터라 자식만큼은 호강시켜주고 싶었어요. 아들이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공부하면서 살기 바랐죠.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지요?
그날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과수원 밭이 꽉 막혔어요. 우리 부부가 물을 퍼내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와서 “(아들 사고 난) 소식 들었느냐”고 해요. 넋이 나간 채로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서도 안사람부터 안심시켜야겠더라고요. “괜찮다, 그놈이 어떤 놈인데. 별일 없을 거다.” 가보니 세 명이나 눕혀져 있고….
지난해 김 씨는 침대 낙상사고로 고관절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는데 김 씨는 회복 이후 “이렇게 죽을 순 없다. 기부를 빨리 추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번 기부 과정을 도운 손상웅 대한전몰군경유족회 군위군 지회장은 “그 돈으로 좋은 실버타운 가서 편하게 지내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절대 안된다더라. 자식을 위해 가치 있게 쓰고 싶으니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하셨다”고 떠올렸다. 손 지회장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순직 유족이 도리어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을 보살피겠다는 숭고한 뜻이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왜 없었겠습니까. 그렇다고 평생 누구를, 무엇을 원망할 수 있나요. 당시 유일하게 생존한 소방관 친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더는 우리 아들처럼 불행한 일을 겪는 소방관이 없어야죠.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빠가 잘한 거지? 네가 너무 보고 싶다.
내내 담담히 대화를 이어가던 김 씨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그는 아들의 흔적이 담긴 사진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얘가 우리 아들입니다. 인물이 훤하지요? 이 놈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단 한 번을 안 나타납디다. 좋은 데로 갔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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