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공룡의 등을 타고
'글. 이정연'

‘극악의 난이도’ ‘압도적인 풍경’ ‘산행 시작 후 절대 되돌아 올 수 없음’ ‘설악의 진수’ ‘산꾼들의 마지막 로망’ 그 말에 나도 필이 딱 꽂혔다. 공룡능선을 가 보리라. 기왕이면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을에 가 보자. 그러나 후배의 아들 결혼식과 집안의 이런 저런 행사로 조금 늦어져 절정의 단풍철이 지나 버렸다. 산이 어디가나 내년에 갈까? 아니지 단풍은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지. 어쩌면 잎 지고 기암과 산세가 고스란히 드러날 때가 더 멋질 수도 있어 마치 말끔히 화장을 지운 미인의 순수한 얼굴처럼.
대구에서 밤 11시에 출발했다. 쉬엄쉬엄 설악산탐방지원센터 소공원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4시 벌써 주차장은 많은 차가 들어찼다. 사람들은 이미 입산 가능시간 3시부터 등산을 시작하고 산 중턱까지 헤드랜턴 불빛이 길게 이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구불구불 불을 뿜으며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 불빛에서 멀어져 숲으로 들어서자 둘째가 연신 하늘을 보면 감탄한다.
어릴 때 고향 하늘에서 본 별들이 다 어딜 갔나 했더니 죄다 설악산 구경하러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호박만한 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내려왔다. 정수리 위로 오리온자리가 뚜렷이 보인다. 예리한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 소원을 비는 아이들의 목소리, 별들이 서로 부딪히면 저런 명랑한 소리가 날까. 서늘하고 깊고 푸른 신비의 밤, 우리는 은밀히 별을 움키러 가는 사람들처럼 급경사 등산로를 엉금엉금 기어서 올랐다. 비선대를 지나 마등령 오르는 길은 험악하다. 여러 산을 올라보았지만 이런 급경사는 처음이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을 오르는 느낌이랄까. 무서워서 컴컴한 골짜기 뒤를 내려다 볼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한다.



한참을 오르자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이 서늘하고 차츰 어둠이 걷힌다. 앞서 가던 사람이 조금만 더 오르면 마등령이라고 한다. 손에 잡힐 듯 가깝던 별빛은 해쓱하게 사위고 동녘 하늘에 분홍빛이 길게 새어 나온다. 일출의 기미다. 헤드랜턴 불빛으로 발아래만 보다가 서서히 속초 시내며 산봉우리가 점차 드러나는 모습이 마치 천지가 새로 생겨나는 것 같다. 그 속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모두 말을 잊고 바라본다.
마등령 아래 바위 옆, 바람을 피해 앉아 아침을 먹었다. 일박 일정을 무박으로 수정하고 급히 잔멸치만 넣어 만든 약식 김밥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시장할 때 먹는 밥, 김밥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느냐고 한다. 마등령에 아홉 시가 넘어 도착하게 되면 공룡능선을 타지 말고 오세암으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비선대로 되돌아 내려가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들었는데 우리는 아침을 먹고 나도 8시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마등령 삼거리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저만치 1275봉 범봉 공룡능선의 준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단풍은 이미 졌지만 그래서 하늘로 거침없이 뻗은 바위봉우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멋지다. 아름답다. 신비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부족한 표현 이런 풍경에 어울리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래서 사람들은 공룡능선에 중독되고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고 하면서도 다시 배낭을 꾸리는가 보다.
잠시 걷는 사이 비경은 눈앞의 봉우리에 가리고 봉우리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차고 거친지 각오하고 바람막이를 입었는데도 몸이 뻣뻣해진다. 아이들도 너무 추운지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고 뒤돌아보니 남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산행 내내 이렇게 춥다면 하산하는 게 맞겠지? 그런 표정이다. 내 마음이 딱 그랬다. 그래도 온 가족이 함께 산행할 기회가 다시 있을까. 등산복 대신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이 몹시 걱정된다. 이 봉우리만 넘어보자. 그래도 계속 이렇게 춥다면 아쉽지만 오늘 산행을 포기하고 오세암쪽으로 내려가자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가면모자로 꽁꽁 싸매고 꿋꿋이 오른다. 저 사람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는 기습적 추위에 허벅지와 발가락에 쥐가 났다. 목아 긴 등산화가 무거워서 트레킹화를 신고 왔더니 그런 모양이다. 조심조심 평평한 곳을 골라 디뎠다. 불안한 마음으로 봉우리 반대편으로 가자 햇살이 비치고 딴 세상처럼 바람이 없다. 비로소 잃었던 정신이 돌아왔다.



잠시 쉬면서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둘 다 괜찮다고 한다. 바람만 없다면 쾌청한 날씨가 산행하기 더없이 좋겠지만 다 좋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공룡능선 접어들고는 듣던 만큼 산행이 힘들지는 않았다. 파란 하늘 연신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기암, 한 봉우리를 오르면 또 내려가고 중간 중간 철제 난간을 잡고 매달리는 긴장감과 재미에 피로를 느낄 새가 없었다. 오히려 비선대에서 마등령으로 오르는 구간이 더 힘들었다. 거의가 급경사에다 조망 없이 눈앞을 막는 산에 압박감이 더했던 모양이다.
좌우로 곧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바위틈을 지나고 고개를 넘고 까마득한 절벽 같은 경사에 난간을 잡고 매달려 내려갔다가 다시 그런 길을 매달려 올라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 뒤 우리는 마침내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추위와 피로에 지쳐 표정조차 얼었다. 희운각대피소에는 온수도 떨어지고 다만 햇반을 데우는 전자레인지뿐이었다. 그것도 줄이 길어 우리 차례를 기다리기에는 하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둘러보니 그 어디서도 온수를 구할 데는 없고 저만치 막 배낭을 꾸리는 분 옆에 버너가 있었다. 미안함을 무릅쓰고 불을 빌었는데 흔쾌히 버너에 불을 지피고 넣었던 코펠을 꺼내 물을 데워 주었다. 미안한 마음에 배낭을 열어 이것저것 챙겨 드렸는데 도리어 배낭 속의 먹을 것을 잔뜩 꺼내 내 앞에 도로 밀어두고 서둘러 떠났다. 산만큼 크고 높은 마음을 산에서 만났다.
천불동 계곡은 아직 화려했다. 절정은 지났지만 남은 단풍이 고와 하산 길의 눈이 즐거웠다. 여기저기 셔터도 누르고 시리게 푸른 계곡물에 단풍이 잠긴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14 시간 산행 후 숲길을 걷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쭉쭉 뻗은 나무처럼 씩씩하다. 가만히 나무에게 물어본다. ‘우리 아이들 멋지지요? 한 줄기 바람이 일며 나뭇잎들이 와르르 박수친다. 이마에 닿는 바람이 상쾌했다.
돌아와 산행기를 쓰는 지금 아직도 나는 설악산 공룡능선을 다녀온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만 공룡의 등을 타고 신비한 선계를 잠시 흔들리며 꿈꾸다 온 것 같다. 다시 공룡능선으로 갈 배낭을 꾸리고 싶다. 그 때는 꿈속처럼 허둥대지 않고, 여유를 갖고 천천히 산과 함께 하고 싶다. 아무리 험하고 먼 길이라도 분명한 목적지가 있으면 어렵지 않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한 발 내딛으면 그 폭 만큼 틀림없이 정상에 가까워진다는 사실도, 수려한 공룡능선의 모습과 더불어 영원히 잊지 않고 싶다. 기억은 우리가 쉬이 잊게 되지만 온몸으로 체험한 감동은 두고두고 가슴을 데울 것이다.

EDITOR AE류정미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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