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향수
'글. 이정연'

영화로도 제작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라는 책을 읽었다. 한 천재적인 작가의 상상으로 태어난 신적인 후각의 소유자인 조향사 그르누이는 오로지 향기 하나에만 집착한다. 마침내 아름다운 여인 스물다섯 명의 생명으로 빚은 생애 마지막 작품 향수가 탄생하고 그르누이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그 향수를 뿌린 채 재판을 받기 위해 군중 앞에 서게 된다. 평생 향기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스스로 향이 되어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들에 먹혀버린 처절한 그의 종말,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도무지 전율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한 때 향수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시내로 나가 일을 보고 나면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이 향수 가게였다. 여러 가지 향을 맡아보고 마음에 드는 향수가 있으면 사오곤 했는데 좋은 향수를 고르는 게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향수는 대개 한 가지 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향이 배합되어 만들어 진다. 뿌렸을 때 처음 나는 향을 탑노트 (Top note),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점차 변화되어가는 중간 향을 미들노트(Middle note), 마지막까지 은은하게 유지되는 잔향을 라스트 노트(Last note) 혹은 베이스노트 (Base note)라고 한다. 이런 세 가지 종류의 향료 진액이 알콜과 배합되어 만들어 지고 시차를 두고 휘발하면서 향기가 나는데, 탑 노트(Top note)는 향수 캡을 열었을 때 처음 느껴지는 향으로 5 ~10분 정도 유지가 되고, 미들 노트(Middle note)는 그 향수의 주를 이루고 있는 향이며 10여분 후부터 계속되는 향이다. 마지막 베이스 노트는 향수를 스프레이한 후 3시간이상 지난 후 맡을 수 있는 잔향으로 흔히 무스크라고 하는 사향노루향이나 우디 향이 많이 쓰인다고 한다. 이 베이스노트가 체취와 더불어 나타날 때 그 사람 고유의 향기가 되는 것이다. 향수는 향의 포함 농도에 따라 지속 시간이 달라지고 부르는 명칭 또한 구분되는데 퍼퓸, 오데퍼퓸, 오데투알렛, 오데코롱 등의 농도 순으로 구분 하고 지속 시간 또한 농도 순으로 길어진다.
향의 지속시간이 이러니 한 번에 여러 가지 향수를 사기는 힘들다. 미니어처를 구입한 후 미들노트까지 맡아보고 자신과 어울리는 향수를 결정하면 좋을 것이다.
옛날 프랑스엔 향수를 쓰지 않으면 귀부인으로 인정해 주지도 않아 이름 있는 조향사 곁에는 늘 귀부인들이 들끓었고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거리에는 온통 오물이 널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어 하이힐이 생겨났다고 할 정도이니 당연히 향수 가게도 번성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좋은 향을 고르면 좋겠지만 향수는 쓰지 않아도 그만이다. 원래부터 체취가 향기로운 사람이 있는데 우리 둘째가 그랬다. 손을 잡고 냄새를 맡아보면 달콤하고 시원한 향기가 맨살에 배어 있다. 이런 사람은 굳이 향수를 쓸 필요가 없다. 또 종일 일하고 약간은 지친 모습의 남자에게서 체취와 섞인 희미한 땀 냄새는 어떤 향기보다 더 호감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향수는 함께 있는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어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소음이나 꼴불견은 귀를 막거나 눈을 감으면 그만이지만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모든 향수가 다 호감을 주지는 않는다. 어떤 향은 어쩐지 매캐하고 맡으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향도 있다. 올백 머리에 기름을 바른 시골 카바레의 남자 댄서를 연상하게 하는 향은 내겐 그대로 고문이다. 향수는 체온이 높고 맥박이 뛰는 곳일수록 효과적이어서 귀 뒤나 팔 안쪽, 손목, 무릎, 목덜미 등이 적당하고 옷이나 액세서리에 뿌릴 때는 스커트 단, 슈트나 넥타이의 안쪽이 좋다고 한다.
수집한 향수를 꺼내 늘어놓고 감상한다. 거의 비슷한 향이지만 유난히 좋아했던 향수는 다비도프사의 쿨워터우먼(Davidoff Cool Water Women)과 로파겐죠사의 로파겐죠포우먼 (l'eau par kenzo for women) 이다. 쿨워터우먼은 바다가 연상되는 깊고 맑은 푸른 빛깔 용기에 향수가 담겨 있을 때는 마치 여성의 허벅지에서 허리까지의 조각품을 연상하게 한다. 사용량이 줄어들수록 예쁜 여인이 점차 옷을 벗어 내리는 것 같아 쓰는 내내 유쾌해 이 용기를 만든 이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로파겐죠는 연한 푸른빛 용기에 맑고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어 깨끗함이 기분 좋았는데 베이스 노트가 정말 매력적이어서 오랫동안 애용하게 되었다. 동양란 몇 송이가 피었을 때 좀 먼 곳에서 맡게 되는 향이 이 향수의 베이스 노트라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애틋하고 뭔가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지는 그래서 곁에 있는 사람을 아껴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향기였다. 향기의 설명치고는 좀 감상적이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생산되지 않았는데 그 다음으로 생산된 로파겐죠사의 향수는 용기도 바뀌고 향도 바뀌고 이름도 로파겐죠팜므로 바뀌었다. 반가워서 미니어쳐를 사 보았는데 향이 좀 달랐다. 가게 주인은 그 향기가 틀림없다고 했지만 베이스노트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향이 가볍고 예전에 즐기던 아리듯이 애틋한 감미로움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향수를 사들이지 않는다. 결국 사라져 버릴 향기에 집착할 나이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그르누이가 마지막 작품 향수를 온몸에 뿌리고 스스로를 소멸시켜 버린 것은 향기의 영속성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은 향기를 영원히 내 것으로 할 수 없다는 절망이 그 자신을 향기로 만들고 사람의 기억 속에서나마 영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정한 향기는 그 사람이 쓰는 향수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영혼에서 풍기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고급 향수를 쓰지 않아도 가슴에 꽃밭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매번 좋은 향기를 풍기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아무리 값비싼 향수를 쓴다고 해도 그의 마음가짐이 곱지 않다면 그는 곧 사라지고 말 향기 같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EDITOR 편집팀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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