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자연유산과 지역공동체
지역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자연유산, 팽나무
'한반도 중부 이남에 자생하는 팽나무'

식물분류학자로서 주로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어떤 식물을 가장 좋아하냐는 물음이다. 예쁘고 귀한 식물들이 여럿 떠오르지만 나의 대답은 언제나 '팽나무'다. 또한 팽나무는 오랜 세월 속에 마을과 함께 어우러져 온 자연유산과 지역공동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랫동안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오고 있는 팽나무는 지역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자연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마을의 평안을 비는 동제의 대상, 팽나무
내가 자란 시골 마을 어귀에는 팽나무 고목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 큰 나무가 유년의 내게는 마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바오밥나무 같았다. 또래가 귀했던 작은 마을에서 그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의 덩치가 몇 아름이나 되는지 두 팔을 벌려 한참을 재보거나, 꾸덕꾸덕 떨어진 고목의 나무껍질로 탑을 쌓기도 하고, 제법 달콤한 열매를 따 먹어도 보고, 자잘한 씨앗을 하나둘 헤아리다 보면 금세 저녁이 찾아왔다. 기쁜 마음을 나누는것도, 속상한 마음을 달래는 것도 팽나무 앞에서였다.

바오밥나무를 연상시키는 팽나무 고목의 밑동, 전남 보길도 세연정(사진.허태임)



친구였던 팽나무가 조금 무서워지는 날도 있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온 마을 사람들이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팽나무 앞에 모일 때였다. 팽나무에 정성스레 새끼줄을 두르고 떡과 술을 차려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하며 절을 올리고 춤도 췄다. 우리 할머니는 하늘의 신이 이 팽나무를 타고 내려와 마을의 소원을 듣고 간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식들 다 잘되게 해 달라며 주문 같은 것을 외우셨다. 그 무렵부터 신을 만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팽나무 곁에머무는 일이라는 것을 조금씩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신목 팽나무와 법수사지 당간지주, 경북 성주군 수륜면 법수사지(사진.허태임)



운명인지 모르겠으나, 석박사 학위 과정을 통과하며 줄곧 팽나무를 연구했다. 정확하게는 팽나무를 비롯하여 한반도에 자생하는 팽나무속(Celtis)의 계통분류에 몰두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에 50여 종이 조금 넘는 팽나무속 식물이 자라고 그중 10%에 해당하는 6종이 우리나라에 산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그 기이한 풍경이 ‘동제(洞祭)’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질병과 재난을 멀리하고 농사가 잘되고 고기가 잘 잡히게 해 달라고 비는동제. 오래 자라고 크게 자란 팽나무는 동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런 당산목은 유구한 수령과 신비로운 수형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다수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보호수는 느티나무와 소나무에 이어 팽나무가 세 번째로 많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와 팽나무가 포함된 숲은 최근 드라마 촬영지로 명성을 얻은 ‘창원 북부리 팽나무’를 비롯하여 2023년 현재 7개나 된다. 팽나무는 보통 수령이 100년 이상 된 고목으로 외롭게 혼자, 그러나 정말 멋진 수형을 갖추며 자란다. 효과적인 자식 생산을 위한 전략 덕분이다. 과즙이 많은 달콤한 열매를 동물에게 제공하면 동박새, 박새, 동고비, 직박구리 등이 팽나무 씨앗을 퍼뜨리는 산포자가 된다. 덕분에 팽나무는 모수(부모나무) 가까이에 모여 자라지 않는다. 후대 양성이 종국에는 홀로 근사한 수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

팽나무(左)와 좀풍게나무(右)의 열매(사진.허태임)



천년고찰 건봉사를 지킨 팽나무, 알고 보니 풍게나무
한반도 팽나무속 식물은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식물분류학자에 의해 얼마간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극히 일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했기에 그 나라에 분포하지 않는 팽나무속 종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했다. 좀풍게나무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팽나무는 한반도 중부 이남에 자생한다. 반면에 좀풍게나무는 중부 이북을 중심으로 자란다. 형태적으로는 열매 색깔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팽나무 열매는 녹색으로 시작해서 붉은 계열로 익지만좀풍게나무는 검은색이다. 정확하게는 녹색으로 시작해서 노란색으로 변하다가 완전히 다 익으면 검은색이 된다. 그 표본과 기록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답습되어 오늘에 이르다 보니 정작 우리 땅에 사는 좀풍게나무를 우리가 잘 모르게 되었다.
우리가 팽나무라고 알고 있는 국내 가로수 중에는 좀풍게나무가 더러 섞여 있다. 정부세종청사에도 있고 안동 도산서원 근처 관광지에도 있다. 경복궁과 창경궁, 청와대에는 팽나무보다 좀풍게나무가 더 많다. 드물게 남부지방에도 좀풍게나무가 산다. 목포 갓바위에 가면 한곳에서 팽나무와 좀풍게나무를 다 만날 수 있다. 남쪽에 널리 퍼져 사는 팽나무가 북쪽의 좀풍게나무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지점이 삼척 부근이다. 중부 이북에 사는 팽나무속 식물 중에는 좀풍게나무뿐만아니라 풍게나무도 있다. 좀풍게나무는 비교적 바다에 인접한 지역에 살지만 풍게나무는 계곡이 깊은 산속에 사는 편이다.

팽나무(左)와 좀풍게나무(右)의 열매(사진.허태임)



‘팽나무 덕분에 불에 타지 않고 불이문이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 건봉사가 강원도 고성에 있다. 절의 입구 불이문은 그 곁을 지키는 500년이 넘은 팽나무 덕분에 화마의 피해를 면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북쪽 지방은 팽나무가 저절로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살아남았다고 하는 그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팽나무가 아니라 풍게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팽나무속 식물 모두의 가장 큰 매력은 씨앗을 싸고 있는 내과피(內果皮)다. 달달한 과육을 제거하면 딱딱한 안쪽 껍질인 내과피. 그 안에 진짜 씨앗이 들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살구나 복숭아 씨앗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오늘날 식물화석으로 발견되는 팽나무 내과피는 과거의 기후와 식생을 해석하는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광물질로 이루어진 그 단단한 갑옷과도 같은 내과피를 뚫고 이른 봄에 여린 싹을 밀어 올리는 팽나무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큰 감동을 준다.
인간과는 견줄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팽나무를 생각하면 지구상의 작은 생물이 되어 한없이 겸손해질 뿐이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좇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것.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팽나무를 자세하게 만날 생각이다.

EDITOR 편집팀
충북문화재단 충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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